“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만 했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흐에 대해 쓴 테제 중 11번째 테제다. 이 말처럼 마르크스주의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의 철학이라는 것을 말이다. “실천”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서 대단히 핵심적인 개념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역사 철학에서 이 실천의 개념은 역사와 인간, 세계의 관계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은 두고 두고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할 때 인용된다.
이 말은 두고 두고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할 때 인용된다.
그런데, 이 마르크스의 테제가 베를린 훔볼트 대학 본관 건물 현관 벽에 붙어 있다. 주변에는 “계단 주의”라는 경고가 계단마다 붙어 있는데 약간 신경이 쓰인다. 정말 계단을 주의하라는 건지, 아니면 마르크스의 말을 “주의”하라는 건지 말이다. 그리고 이 테제는 무슨 까닭으로 여기 붙어 있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 대학 출신이다. 정말 그뿐일까?
훔볼트 대학은, 베를린대학이라는 이름으로 1810년 개교했다. 빌헬름 훔볼트가 고안한 모델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1949년에 그의 이름을 따라 지금과 같이 훔볼트 대학으로 이름이 바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1836년부터 1840년까지 이 대학 법대 학생이었다. 그뿐 아니라, 헤겔, 비스마르크, 아인슈타인, 그림 형제 등도 이 대학 출신의 학생이거나 교수다. 그러나 이름만 들어도 있어보이는 이 대학의 운명은 그렇게 평탄치 않았다.
나치 집권기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대학 역시 파시스트들이 장악했다. 파시스트들은 “반(反) 독일적”인 교수나 저자들의 책을 다 불태워버렸는데, 안타깝게도 훔볼트 대학 도서관의 책들이었다. 훔볼트 대학은 독일 지성의 상징이었다. 본관 건물 길 건너편에 있는 현 대학도서관과 법대 건물 앞 광장이 있는데, 그곳이 이 천인공노할 분서갱유의 현장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아예 지금의 본관 건물이 파괴되어버렸다.
대학도서관 앞 광장. 이곳에서 나치 분서갱유가 일어났다. |
전쟁이 끝난 뒤, 모두가 아는 것처럼 독일은 둘로 나눠졌고 이 훔볼트 대학이 있는 곳은 동베를린에 속했다. 동독은 이 대학 본관 건물을 다시 짓기로 결정하고 건물 현관을 마르크스에게 헌정하기로 했다. 1953년 5월이었다. 마침 그때가 마르크스가 태어난 지 135년, 사망한 지 70년이 되던 해였다. 나는 마르크스가 이런 기념을 좋아했을거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동독의 집권당,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마르크스의 이름을 파는 것에 부끄러움을 몰랐다. 스탈린주의 국가, 동독은 그렇게 해서 한 동안 마르크스, 레닌의 이름을 팔며 계속 유지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마르크스, 레닌의 상징은 훔볼트 대학 도서관 안에도 있는데, 광장쪽으로 난 대형 창문에 이들의 모습이 썬팅(?) 되어 있다.
대학도서관 내부. 마르크스, 레닌의 모습이 썬팅되어 있다. |
통일 뒤, 동독의 마르크스 숭배는 자연스럽게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무너져버린 동독과 함께 마르크스도 철거당할 위기까지 갔다. 마르크스의 명언 한 마디가 벽에 새겨있거나, 또는 그의 동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마르크스 숭배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은 확실히 숭배의 방식을 띠며 사람들에게 강요했고 그것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박제화하는 것이었다. 분노가 없을 수 없었고, 논쟁은 한동안 뜨거웠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 붙어 있다. 아마도 “계단주의”는 이런 뜻일 게다. 마르크스의 말을 박제화하지 않게 주의하라는. 이 “계단주의”는 2010년, 훔볼트 대학 개교 200주년에 맞춰 디자인되었다.
글, 사진: 김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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