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본 탑. 가까이 가면 갈수록 모파상이 한 말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모파상은 에펠탑을 두고 “이 삐쩍마른 멀대같은 철 사다리 피라미드, 크기만하고 볼품 없는 해골"이라고 말했다. 사진 김승현. |
에펠탑은 1889년 세계박람회와 프랑스혁명 100주년에 맞춰, 프랑스 정부 계획에 따라 알렉산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박람회장 입구에 큰 아치형 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때 에펠은 탑 소개를 하며 "프랑스 혁명에 대한 헌사"라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도 에펠도 세계박람회를 통해, 주최국인 프랑스의 경제 발전과 국력을 뽐내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에펠 자신도 프랑스의 괄목할만한 기술과 경제 진보를 진정으로 상징하는 것이 새로운 물질, 철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땅에서 솟은 듯하며 바람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같은 탑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철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탑이 기상, 전보 등에 유용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박람회가 끝나고 탑도 같이 없애버려야 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탑은 안테나로 계속 쓰일 수 있었다. 철 이야기를 더하면, 같은해 박물관을 위해 만든 전시관 가운데 “기계관”은 폭과 길이가 115*420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로 기둥 없이 모두 아치로 연결된 커다란 철 덩어리였다.
알렉산드르 귀스타브 에펠 |
철과 에펠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에펠은 독일 이주민 집안 출신으로(이름에 들어가는 ‘에펠’은 이 집안이 프랑스로 이주하기 전 살던 곳의 산 이름이다), 석탄 산업에 발을 들여 성공한 부모 아래서 기계를 공부하며 자랐다. 차츰 이런 저런 건설 공사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에펠은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큰 돈을 빌려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그의 회사는 당시 철을 사용한 산업의 발전 - 영국 산업 혁명의 기술들을 프랑스가 뒤늦게 받기 시작해 이때부터 크게 성장하는 교량, 철도 사업 - 덕분에 초기부터 크게 성장했다. 사실 프랑스는 산업 기술 발전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받기는 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 영국의 대륙 봉쇄, 무엇보다 국내 정치 불안 등으로 이미 18세기부터 발전했던 영국에 비해 뒤쳐지고 있었다. 에펠 회사의 성장 배경이기도 하다.
애초에 철 덩어리 탑을 파리 한 가운데 세우자는 계획은 반대가 많았다. 그럼에도 파리 시는 계획을 강행했는데, 단가를 경쟁사보다 낮게 제시한 에펠의 설득도 한 몫을 했다. 에펠은 초기 건설 비용으로 예측한 6백5십만 프랑보다 훨씬 낮은 1백5십만 프랑을 제시했다. 대신 에펠은 건설비용을 낮추는 조건으로 세계박람회 전시 중, 그리고 이후 20년 동안 수익을 자신이 가진 뒤 정부에 반환하기로 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탑의 이름이 에펠로 된 것과 달리 디자인을 한 사람은 에펠이 아니라는 것이다. 디자인은 스테판, 모리스, 에밀리(Stephen Sauvestre, Maurice Koechlin, Emile Nouguier), 이 세 사람이 했으며, 에펠은 주로 탑 건설의 기술적 부분에 관여했을 뿐이고, 탑을 전망대로 만들어 입장료를 받을 생각을 한 회사의 주인에 불과했다.
에펠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사실 중 하나는 그의 부패 전력이다. 1880년 프랑스 정부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 운하는 1914년 미국이 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전 프랑스 정부가 먼저 참여했었다. 그런데 80여킬로미터에 달하는 운하 공사를 하다보니 말라리아 같은 질병에 여러 기술적인 문제들까지 겹쳐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추가 비용 마련을 위한 법을 통과시키려다 정부가 국회의원을 매수했던 일이 폭로되어 결국 사업이 중단되었다. 이를 파나마 스캔들이라고 하는데, 에펠은 파나무 운하 건설 기금을 횡령해 법원으로부터 2만 프랑의 벌금과 2년 징역형을 받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에펠을 재능있고 성공한 엔지니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에펠이 탑 건설에 사용한 기술은 과감한 것이었다. 탑을 보면 그 위치가 강둑이어서 지반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에펠은 이를 극복했다. 게다가 탑이 매우 높아 고공에서 오랫동안 작업을 하는 데도 특별한 기술들이 필요했다. 에펠은 이런 데서 탁월한 면이 있었다. 이미 그의 기술적 탁월함은 일종의 조립식 교량 건설 표준을 만들었던 데서 잘 드러나는데 길이든 강이든, 기술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표준대로 조립하면 다리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탁월함으로, 파리의 전경을 내려보다 불쑥 튀어나와있는 탑의 흉물스러움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건설 초기부터 파리의 예술가들도 이 때문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명 운동까지 벌이며 반대를 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비록 많은 관광객 덕분에 돈벌이가 되기는 하지만, 유지 보수 하는데도 많은 비용이 든다. 7년에 한 번씩 기본적으로 60톤의 페인트를 칠한다. 한 번 칠할 때마다 열여덟 달 동안 스물다섯 명이 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탑의 조명을 밝히는 데도 전기가 많이 들어간다.
어쨌든 건설이 마무리되고 난 뒤 파리 사람들은 툴툴대면서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던 듯하다. 모파상은 끝까지 에펠탑을 욕했지만 탑의 2층에 올라가 점심을 종종 먹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삐쩍마른 멀대같은 철 사다리 피라미드, 크기만하고 볼품 없는 해골을 안 봐도 되는 곳은 파리에서 여기뿐이다."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본 에펠탑. 1889년 당시 이 광장이 박람회 장소로 쓰였다. 하지만 100년전 이 광장은 피가 낭자한 학살과 분노의 장소이기도 했다. 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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