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역사박물관 Musée Carnavalet: 공식 프랑스 혁명사를 한 눈에


* 파리역사박물관 정원의 모습. 

이 건물의 이름은 HÔTEL CARNAVALET 이다. 1548년부터 1560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건물은 파리에서 보기드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이름에 카르나발레가 들어있는 것은 1578년 당시 새 주인의 이름이 브리타뉴의 케르네브노이(Kernevenoy) 부인이었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후 증축이 몇 차례 이뤄졌고 적어도 프랑스혁명때까지는 계속 개인 주택이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정부 소유가 된 듯한데 몇 개의 공공 교육 기관이 들어와 있다가, 1866년에 파리 시가 사들여 이곳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71년 파리코뮌 당시 화재로 박물관 물품들이 불타버려 한 동안 박물관 기능은 정지되기도 했다 1880년에 재개장했다. 현재 파리역사박물관 건물이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단연코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 하면, 아무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다 아는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박물관은 프랑스혁명을 매우 잘 정리해 놓았고, 파리 내 프랑스혁명 유적지를 표시해 놓은 지도가 걸려 있는데 이를 잘 참고하면 파리 여행을 더 알차게 할 수도 있다. 만약 프랑스어를 잘 한다면 말이다.
이 기사에서는 이 곳 박물관의 일부 그림이나 소장품을 소개하기 전에 누구나 다 알것 같지만 잘 모를 수도 있는 프랑스 혁명 이야기를 먼저 언급할까 한다.
프랑스혁명 하면, 대략 절대 왕과 귀족과 성직자 중심의 세계에서 천대받던 시민과 노동자 빈민들이 힘을 모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궐기한 혁명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않고, 한 날 한 시에 분출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쟁취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벤트도 아니다. 그런 혁명은 없다. 프랑스 혁명도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사회는 신분제 사회였다. 거칠게 말해 제3신분이라고 불렸던 시민과 그 이하는 의무만 있을 뿐 권리가 없었으며, 왕과 귀족, 성직자는 권리만 있을 뿐 의무는 없었다고나 할까.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제 3신분은 왕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에 저항할 어떤 근거나 세력이 되지 못했다. 이들은 왕과 귀족에게 기대어 작은 변화를 바라기를 멈추고 왕과 귀족 성직자 중심의 세계를 비난했다. 그러자 왕 귀족 교회에 질린 도시 노동자 빈민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리고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과 상퀼로트들이 바스티유를 향했다. 절대 왕정의 정치범 형무소였고, 무엇보다 거기에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스티유는 이 날 무너졌다. 바스티유에 관한 재밌는 일화를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날 수백년 동안 유지되던 신분제 사회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이튿날부터 프랑스가 법과 원칙에 근거해 권리와 의무를 지는 그런 사회가 된 것도 아니다.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반혁명의 초점이 된 왕과 왕비를 처형해야 했고, 혁명에 도전하는 외국 군대에 맞서야 했으며, 혁명을 후퇴하려는 자들에 대한 공포정치(이때 테러라는 말이 나왔다)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 기간이 대략 5-6년이 걸렸다. 그리고 매번 그때마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세력들 사이의 투쟁이 벌어졌고 한때 혁명의 일부였던 사람이 사태의 진전에 따라 반혁명의 일부가 되어 있기도 했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당통과 라파에트일 것이다. 이들은 왕당파에 가까웠다. 자코뱅 카페에 자주 모였다는 공화주의 급진파들은 사실 혁명 초기에는 소수였고 오히려 느슨하게 모여 있는 정치토론 집단이었다. 이 역시 혁명의 전진을 위해 왕정으르 폐지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우리가 아는 급진파가 된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제3신분인 시민 - 이때는 부르주아(유산자, 또는 자본가) 계급을 뜻했다 - 계급은 자신의 세계관을 닮은 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왕과 귀족 밑에서 무언가를 바꿔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화국을 세웠다. 법 제도를 새로 만들었고 왕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법치주의를 세웠으며 생산과 상업의 자유를 확대했다. 적어도 이 기간동안 프랑스 제3신분은 자신의 세계를 향한 초석을 깔아 놓은 셈이었다.
이것은 이 혁명이 누구의 혁명이었는가를 말해준다. 제3신분의 이 프랑스 인권 선언의 초안을 작성한 에마누엘 조세프 시에스는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라는 영향력있는 팜플렛에서 이렇게 썼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가? 무언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제3신분은 그 무언가가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1794년 나폴레옹의 집권으로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후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고, 조금은 물렁해진 신이 다시 등장했다. 신이 아닌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국민 국가를 만들려했던 급진 공화파는 제거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은 패배한 것일까?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제3신분, 즉 자본가 계급 중심의 세기를 향하는 프랑스의 시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반혁명의 주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 고대 로마 황제 시저의 흉내를 내며 - 유럽 정복 전쟁에 바뻤고, 게다가 정복지에 프랑스 혁명으로 만들어진 국가 프랑스를 닮은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유럽 여러 왕국의 왕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 가족들을 앉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프랑스가 잉글랜드와 함께 근대 국가, 즉 시민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국가의 모델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부르주아들을 한껏 고무했고, 이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진했다. 물론 이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한, 부르주아지가 전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비례해 프롤레타리아트를 계속 생산해냈으며 둘은 갈수록 더 자주 충돌했지만 말이다.

글, 사진: 김승현
박물관 주소: 16 Rue des Francs Bourgeois, 75003 Paris, 프랑스
웹사이트: http://www.carnavalet.paris.fr/




상퀼로트: 루이스 레오폴드 부알리가 그린 1792년에 그린 이 그림은 “상퀼로트”로 알려져 있다. 혁명가들의 별칭으로 주어진 이 이름은 -  귀족이나 부르주아지들이 입던 - 무릅까지 올라오는 짧은 “퀼로트” 바지 대신 펑퍼짐한 긴 바지를 입었다. 이들은 또한 삼색의 모표가 달린 필그리아 식 모자를 쓰고 다니곤 했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자유를 얻은 노예들의 복장이기도 했다. 긴 줄무닌 셔츠는 “혁명적 패션”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었으며, 파이프 담배와 나막신은 민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했다.  도시 하층 출신의 이 상퀼로뜨들은 인민 주권에 기초한 평등주의적 공화국을 요구했다. 이들은 인근의 급진적 정치 클럽 등에서 모여 토론하곤 했는데, 1792년 8월 10일의 튈레리에 궁의 공습도 이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왕정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상퀼로뜨는 삼색기를 들고 있다. 혁명의 산물로서 이 깃발은 파리를 뜻하는 붉은색과 파란색, 그리고 왕조를 뜻하는 흰색이 결합된 것이다. 이 삼색은 초기에 모표로 쓰였는데, 1794년부터 국민의회에 의해 수직으로 이어지는 삼색이 나란히 있게 되었다. 그림 속 깃발에는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는 말이 쓰여있는데, 동시에 프랑스 공화국의 모토가 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말이 쓰이기도 했다. (그림, 설명: 파리역사박물관 역:김승현)



혁명 전 프랑스에는 대략 2천8백만명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각자가 가진 특권에 따라 3개의 “신분”으로 나눠져 있었다. 왕을 위해 기도하고, 왕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평범한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영광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1신분이었고, 군사적 의무를 진 귀족들은 2신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98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 부르주아지, 무역인, 수공업자, 농민들은 모두 제3신분이었다. 
당시에 가장 흔한 형태로 이 앙시앙레짐을 비판하는 형태가 그림이었는데 이 그림을 보면, 제3신분이 성직자와 귀족들을 등에 업고 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성직자이며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귀족이다. 게다가 제3신분이 세금 부담을 지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가장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빈부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저항에 나섰다. 그래서 이 그림 밑에는 “이런 시합이 끝나기를 바라자” 하고 (은유적으로) 써있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변화가 멀지 않았음을 바라고 있다. (설명: 파리 역사박물관 역:김승현)



1789년 7월 12일 튈르에 궁전에서의 충동. 네케르의 해임에 항의하는 궁중들이 튈르에로 쳐들어가 왕자들과 마주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일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쳐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 역사박물관 Carnavalet 소장 그림. 사진 김승현.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공격. 바스티유(La Bastille)는 14세기에 지은 요새의 일부로 샤를 5세의 시 성벽의 일부였지만 리슐리에가 국가 형무소로 바꿨다. 1789년, 도시 중심부에 있던 바스티유는 정치범이 수용된 곳으로 미움의 대상이었는데, 이들 정치범들은 왕에 도전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1789년 7월 14일 당시에는 사실상 비어있었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화약을 찾아 들이닥쳤다. 당시 안에는 일곱 명의 수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지만 바스티유를 공격한 것은 절대 왕정의 상징을 공격한 것이기도 해 이후로 바스티유 공격일이라고 하여 민중이 자유를 찾은 날을 상징하고 있다. (설명: 파리 역사박물관 역,사진: 김승현)



Jacques de Flesselles의 학살. 7월 14일, 바스티유를 공격한 같은 날, 성난 군중은 오늘날의 파리 시장과 유사한 직위를 가졌던 Jacques de Flesselles을 앙시앙레짐을 대변하는 자라 하여 살해해, 그의 목을 창에 꽂고 행진했다. 그는 살해 당하기 전 파리시청 계단에서 자신의 일을 강력히 정당화하던 중 총에 맞아 죽었다. 파리 역사박물관 Carnavalet 소장 그림. 사진 김승현




1793년 1월 21일 루이16세의 처형. 파리 역사박물관 Carnavalet 소장 그림. 사진 김승현



바스티유의 파괴: 파리사람들에게 바스티유는 (전에는 요새였다가 혁명 전에는 감옥이 된)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재판 없이 왕의 명령만으로 수감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옥은, 파리 사람들이 무기와 폭탄을 찾아 공격한 1789년 7월 14일에 사실상 비어있었다. 그날 밤, 건설업자인 삐에르 프랑소아 팔루아가 사람을 보내 이 절대주의의 상징을 해체해버리라고 했다. 그는 작업장 주변을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면서 요새의 벽돌을 기념품으로 나눠주었다. 또 팔루아는 이 벽돌들을 옛 요새의 모양으로 깍아 만든 조각들을 새로 만들어진 83개의 디파르망(행정 단위)에 보내기도 하고, 루이 16세와 그 장관들, 심지어 미국의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에게 까지 보냈다. (설명: 파리역사박물관 역:김승현)




소수 시계(Dicimal Time): 1795년에 만들어진 이 시계는 매우 보기 드문 것이다. 이 시계는 프랑스 혁명 기에 만들어진 소수 시간에 맞춰 움직인다. 앙시앙레짐에서 측정 단위들이 전국적으로 달라,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뿐아니라 기업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국민의회는 1790년에 과학아카데미의 전문가들에게 전국적으로 통일된 간단하고 정확한 측정 단위 시스템을 내놓으라고 요청한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미터, 킬로그램, 리터로 모두 소수에 기초했다. 시간까지 포함한 모든 것은 이리해서 열로 나눠질 수 있었다. 주는 열흘로, 하루는 열 시간으로, 시간은 십분으로, 그리고 분은 백초로 나눠졌다. 

대부분의 소수 시계들은 눈에 띠는 커다른 가운데 다이얼을 가진 해골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다이얼은 소수 분할을 보여주는데, 열 시간으로 된 하루이며, 새로운 공화국 달력의 이름들이 있다. 새 달의 이름은 1792년 9월 22일부터 시작하는 반디메르 1일부터 달라졌는데, 이 날은 공화국이 선포된 날이다. 소수 체계는 결코 계시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공화국 달력은 1806년 1월 1일까지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설명: 파리역사박물관 역:김승현)



징집: 1789년 7월 14일에 만들어진 자발적 군대인 국민방위대는 1791년까지 라파에트 백작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군대는 프랑스 근위대의 군복을 입었고, 바스티유 습격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금메달을 국민방위대는 차고 다녔다. 혁명 기간 동안 이 표식은 혁명 시기 많은 전투에 자원병을 모집하는 데 사용되어다. 1792년 7월 11일, 국민의회는 “조국이 위험에 빠졌다” 하고 선언하고, 파리에 모든 자원병들을 소집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경험도 부족했고, 전문적 훈련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의지만큼은 높았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프랑스는 곧 장교와 사병들이 부족해졌다. 자원병들 역시 부족해져갔고, 강제적으로 징집되기 시작했다. 1793년, “Levy en masses”(대량 징집)이 18세부터 25세까지 결혼하지 않았거나 애가 없는 기혼남 모두를 대상으로 시작됐다. 1798년 9월 5일, 주르당 델브레 법이 도입되어 “모든 프랑스 남성은 군인으로 조국을 지켜야 한다”하므로서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설명: 파리역사박물관 역:김승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변호사 출신의 막시밀리앙 로베스페에르는 1789년 제3신분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부패할 수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힘있어 보이는 개성과 웅변 덕분에 명성을 얻었다. 1792-1795 사이의 국민의회에서 재선되었을 때, 그는 상퀼로트와 가깝고 민중의 요구를 잘 듣는 극좌파 “산악파”의 일원이었다. 

여기 사진의 로베스피에르는 행동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아하게 차려있고, 머리에 분을 입힌 독특한 외모로 그려져있다. 
공안위원회에 속했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정부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다. 1793년 봄에 만들어진 그의 정치 조직은 당시 국경 바깥의 위협뿐만 아니라, 국내의 공화파 지지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에서 공화국을 살리는 것이었다.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그는 1794년 7월 27일에 체포되었고 그 다음날 그 지지자들과 함께 길로틴에 의해 참수당했다. (설명: 파리역사박물관 역:김승현)



이 흉상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의 초기 흉상 중 하나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다. 그는 청년 장군으로 이탈리아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제 이집트 원정대를 이끌며 점차 인기를 얻고 있었다. 1799년 12월 9일, 그는 통령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자신을 임시 집정관으로 지명하고 한 달후에는 제1집정관이 되었다. 

여기 흉상은 실제 크기로 군복과 야윈 얼굴, 홀쭉한 볼, 날카로운 턱, 목까지 내려온 긴 머리 등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깨위의 망토는 당시 전통적인 기념복장임을 보여주는데 왕이나 주권자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영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조각가 샤를 루이스 코르베의 이 작품으로 그는 곧 성공했고 대리석, 청동 등의 많은 복제품이 나왔다. (설명: 파리역사박물관 역:김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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