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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쪽에 보이는 건물이 Topography of Terror(나치전범기록관), 왼쪽에 보이는 기다린 벽은 셀제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 베를린 장벽 일부. 기록관에서 보이는 벽면이다. 장벽 너머는 옛 동베를린이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은 1961년 8월 13일부터 구 동독 정권이 만들기 시작했다. 그 길이가 150킬로미터에 달했다. 장벽은 서베를린으로의 이주를 막고 통제하기 정책이었는데, 1949년 10월부터 1961년 8월 사이에 2백7십만 명이 동독을 탈출했다고 한다. 이 장벽에서, 1989년까지 최소 136 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98명은 장벽을 넘으려다 사망했다.
상당수가 장벽 수비대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부터 시작되었고,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전 이미 상당 부분이 무너졌다. 여기 남아 있는 것은 당시의 장벽으로 200미터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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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전범기록관 전경 (사진: berlindividedcity.wordpres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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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5일, 경찰과 SS 완장을 찬 예비 경찰이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일에 순찰을 돌고 있다. |
* 경고: 이 기사는 나치 전쟁 범죄와 관련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사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들은 모두 독일 베를린 Topography of Terror에서 실제 전시되는 것들로 이 전시관은 남녀노소 누구나 무료로 입장 가능한 곳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웹이라는 제한과 글쓴이가 직접 방문, 촬영한 것을 선택적으로 게시하고 있는 사정으로, 전시관의 의도와 다르게 전달될 수 있는 점을 우려해 미리 경고해 드립니다.
베를린 영화제를 주관하는 본부 건물이 있고 그 주변엔 대형극장, 아이들 놀이시설, 쇼핑가가 있으며, 또 헐리우드처럼 길 바닥 위 청동판에 새겨진 유명 영화인의 이름을 찾는 것 같은 이런 저런 쏠쏠한 재미가 있는 포츠다머플라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나치 전범을 기록한 사진들을 모아 방문객을 위한 설명을 꼼꼼하게도 달아 놓은 전시관이 있다. 바로 토포그라피 오브 테러(Topography of Terro)다. 번역하면 "[나치] 공포의 해부" 쯤이 되겠지만, 부르기 어색하니까, '나치전범기록관'이라고 하자. (이곳에 딱히 관련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박물관이라 부를 수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사진들과 사진 설명이 다니까 '기록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현대식 건물이 베를린 한 복판에 난 허허벌판에 떡하니 서있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 사정은 건물도 건물이지만 독일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 건물의 이름에는 '테러'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그것은 이 곳이 원래 독일 비밀경찰, 즉 게슈타포의 본부와 제국 SS(무장친위대)와 그 지도부, 그리고 SS 산하 정보국(SD) 건물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으며, 1939년부터 45년 사이에는 제국 정보국 본부 건물이 추가로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을 이끄는 데 필요한, 당시 국내외 즉, 독일과 독일 점령지에서 행해진 모든 억압적인 정책들이 이곳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은 당연히 모든 분노와 공격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이 건물의 수명이 45년으로 끝난 것은 이와 관련 있다. 전쟁이 1945년에 끝나기도 했지만, 베를린까지 들이닥친 연합군의 공격의 표적이 되기도 했고, 또 방어의 최후 보루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건물이 상당히 파괴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6년, 남아 있는 잔해까지 아예 해체해버린 것이다. 이곳이 벌판이 된 사연이다.
하지만 그 사이 새 건물을 지었을 법한데 방치되어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건물 앞에 서 있는 옛 베를린 장벽이 말해준다. 전후 미, 소, 영, 프에 의해 독일이 분할되었다. 베를린은 소련 관할 지역, 즉 나중에 동독이 되는 곳에 있었는데 수도였기 때문에 이 곳도 네 나라가 분할하기로 했다. 만약 냉전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냉전 덕분에 베를린은 동독에 갇힌 셈이 되었고, 1961년 8월부터는 서베를린 지역을 장벽으로 막아버려, 동독 지역 사람들의 서베를린으로의 이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철의 장막이 세워진 것이다. 이제 서베를린은 서독의 처지에서 일종의 낙도, 섬같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서베를린 지역에 있던 이 황량한 터는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
지금과 같은 노력들이 처음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은 1987년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곳으로 계발된 것이다.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두 독일이 통일되었고, 그 후 새로 단장하기 시작해, 2010년 5월에 지금과 같이 재개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이 곳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이 아직 많고, 그때문에 이 곳은 무척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아마 입장료가 공짜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도 있다.
베를린에 가면 이 곳을 꼭 방문해,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느껴보자. 경제 위기 시대, 파시스트들이 스물스물 등장하고 있는 유럽에게 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긴 말보다, 사진을 보자.
글, 사진: 김승현
주소: Niederkirchnerstraße 8. 10963 Berlin
웹사이트: http://www.topographie.d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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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5월 16일 Karlsruhe. 사민당 지도부가 체포되어 사람들 앞에서 SS 경찰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 이 중에는 국회의원, 주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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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Dortmund, 3월 5일 제국의회 선거가 끝나고 나치에 반대한 정치인들이 SA 감시 아래 벽에 써진 공산당의 구호를 지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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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5월 2일, 사민당 지역의회 의원인 Hermann Weidemann이 SA에게 공개적인 모욕을 받으며 악명 높은 "보호구금(protective custody)"을 향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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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6일 추정, 베를린. SA 예비경찰이 반정부 활동가들을 체포한 상태의 모습. 플렛첸지 감옥이 아닐까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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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추정. 비밀경찰, 게슈타포 본부 사무실의 정문 모습. 독일과 독일 점령지에 있는 게슈타포 사무실에는 거의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게슈타포는 기존 감옥에 재판전 구금을 위한 특별 감옥을 설치하기도 했다. 1933년 여름에는 베를린, Prinz-Albrecht-Strasse 8번지에 있는 국가비밀경찰사무실, 게슈타포 중앙본부에 특별 감옥을 열었다. 여기서 게슈타포는 경찰 본부, 지역 형무소, “콜롬비아” 강제수용소, 그리고 나중에는 Sachsenhausen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을 데려와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며칠, 몇주, 몇달씩 감금된 채 다른 곳으로 이동되기 전 계속 수사를 받았다. 이 특별 감옥에는 38개의 개별 감옥과 하나의 공동 감옥이 있었다. 그리고 고문이 이루어졌다. 고문이 하도 심해 “죄수”들이나 심지어 가족들까지 고문을 받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자살에 성공하기도 했다.
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나치 정권에 반대한 정치범들이었는데,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도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받은 사람중엔 1939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시도로 민휀에서 히틀러에게 폭탄 공격을 했다 실패한 Georg Elser도 있었다. 1942년에는 나치에 저항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고문을 받았다. 게슈타포는 이들에게 “붉은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날 참가한 사람들 역시 이곳에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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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7월 31일 Breslau. 경기장에 히틀러가 귀빈으로 초대되어,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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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1일, 베를린. "독일식 경례". 빌헬름 광장의 총통 관저 밖에 모인 군중들. 뮌헨 대회와 수데텐 위기 해결 후 베를린으로 돌아온 히틀러를 사람들이 반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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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두 여성이 머리를 깍인채 비밀 경찰에 이끌려 거리를 공개적인 모욕을 받고 있다. 왼쪽 여성의 목에는 "저는 전범자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저는 독일인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하고 쓰인 푯말이 걸려 있다. 독일인 사회는 파시스트 나찌의 표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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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1월 Nagold. 1933년 11월 12일에 열린, 독일의 국제연맹 탈퇴 총투표에 "반대" 표를 던진 사람이 공개 모욕을 받고 있다. 플래카드에는 "저는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저는 독일인의 배신자입니다" 하고 써있다. 당시 투표의 투표율은 96.3퍼센트였고, 95.1퍼센트가 찬성, 4.9퍼센트가 반대했다. 제국의회 선거도 같은 날 열렸는데, 95.2퍼센트 투표율에 무효표가 7.8퍼센트 나머지는 모두 찬성이었다. 투표 용지에는 나찌당만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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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Linz 추정. 전범자, 강제수용소 "죄수"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여성 두명이 공개 모욕을 받고 있다. "저는 독일인 사회에서 쫒겨났습니다" 하고 써있다. 제복을 입은 사람은 비밀경찰이다. 이런 행위는 1940년과 41년에 나찌당이 주도해 이뤄졌는데, 여성들이 사람들 앞에서 머리가 깍이고 시내를 행진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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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25일, Braunschweig. SS 경찰이 사민당 시장 Ernest Bohme를 공개 모욕하고 있다. Bohmesms는 완장을 두른 채 시내에서 감옥까지 걸어가며 모욕을 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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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SS무장친위대 자원자를 모집하는 포스터. 포스터에는 17세 이상 SS무장친위대 참가"라고 쓰여있다. 이 무장친위대 모병은 수년동안 계속이어졌다. 무장친위대가 너무 많거나, 전쟁 말엽의 엄청난 손실로 인해 잠깐씩 멈추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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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프랑스 파리, 동부역.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SS무장친위대원들이 역을 출발하고 있다. 하인리히 힘러는 무장친위대 모병을 확대하기 위해 "반볼세비키" 자원병을 해외에서도 뽑도록 했다. 예컨대 샤를마뉴 친위부대는 프랑스인 자원병만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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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Kreuzberg. 베를린 사무실로 추정. SS 인종/정착 본부(RuSHA). 이 본부는 주로 SS 부대원들의 인종 증명이나 결혼 요청을 처리했다.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인종 전문가"들은 동유럽 점령 지역의 "인종 정책" 분야에 참가했으며 또한 독일과 서유럽의 "유대인과 유대혼혈인" 파일을 정리했다. 1939년에 히틀러는, "제국 SS 지도부의 임무는 독일 제국과 독일인 사회를 위협하는 다른 인종적 요소를 중화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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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6월 17일.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제국 SS 대, 독일 경찰의 수장직을 맡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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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제목으로 "제국의 SS대와 독일 경찰의 새로운 수장 하인리히 힘러" 라고 쓰여있고, 그 하단에는 독일 내부의 큰 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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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7/8일. 베를린. 제국안보국의 주요 인물들이 인민재판에 참석했다. 이 재판은 7월 20일의 쿠데타 시도에 참가한 자들을 상대로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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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월 29일. "독일 경찰의 날", 나찌 겨울 지원에 기부를 호소하는 포스터. 포스터에는 "범죄에 맞선 싸움"을 하는 범죄수사국의 모습과 이들이 나찌 "독일인 사회"에 헌신한다고 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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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40년 추정. Lublin 인근. 폴란드계 유태인들을 습격해 체포된 사람들을, 탈출을 막기 위해 울타리 밑 땅바닥에 엎드려 놓았다. 이 사진은 체포에 참가한 경찰이 찍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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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40년 추정. Lublin 근처.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체포해 모욕을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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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추정. Sachsenhausen 강제수용소에서 온 노동여단 죄수들. 배경에는 "보호구금캠프"라고 써있는 건물의 정문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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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유럽 점령국 내 강제수용소와 게토의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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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22일 추정. SS 소속 남녀가 휴양지에 와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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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5년 사이의 사진. SS기록국이 촬영한 Mauthausen 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이 총살된 모습. 이들은 탈출시도를 하다 총살되어 촬영되었는데, 일부는 죄수를 죽인 자가 직접 사진 촬영을 위해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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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나찌당의 "인종정책국"이 월간지 "새 국민" 에 게재한 광고 포스터. 나치의 인종선언을 선전하는 "인종정책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순수한 독일 혈통을 위한 이상적인 건강과 능력을 강조하는 한편, 비생산적 질환과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밑바닥 존재"라고 해 "생산적인 독일인 사회"에 부담이 된다고 선동했다. 이 포스터에는 "유전적 결함은 독일인 사회에 6만 마르크를 축냅니다. 그 돈은 여러분의 돈입니다..." 하고 쓰여있다.
국가사회주의당은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1933년에는 “유전적 장애 방지법”을 만들어 이미 이들의 처형을 위한 근거를 만들었다. 이후 보건국, 지방정부, 정신병전문의, 경찰국은 공동으로 장애인과 정신질환 가진 사람들을 “ballast existance”(밑바닥 존재”라고 해,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축내는 존재라고 불렀다. 1939년 10월,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자로 보낸 공식 문서를 통해 장애인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살인 프로그램은 “안락사”라고 명명되었는데, 사람들에게는 그 뜻이 불분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나찌 지도부는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일하지 못하고“먹기만 하고 쓸 데 없는 사람들”이라 부른 사람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독일 내 구호소와 거주 지구에 사는 대략 7만 명의 정신 지체아와 환자를 살해와 “T4 위원회”베를린의 Tiergartenstrasse 4번지에서 이름을 딴 것이었는데 여기에 사무실이 있었다.이런 살인을 막기 위한 환자 가족들의 저항이 T4위원회를 제지했지만 비밀리에 감옥과 강제수용소가 확장되었다. 제국범죄수사국 경찰 본부의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다양한 방법의 살인 기술이 동원되었는데, 가스실, 독약, 영양실조를 통한 살인 법이 있었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 중에는 나중에 “라인하트” 작전으로 알려진 유럽의 유대인 대량 학살에도 참가했다. 나찌가 살해한 이들 환자들의 수는 26만에서 30만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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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 추정. 환자를 수송하는 모습. 이 환자들은 나중에 비밀리에 시설에서 살해되었다. 사진의 "비영리환자수송회사"라고 쓰여진 것은 사실 "T4" 중앙 사무실의 운송국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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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Hadamar의 보호시설을 몰래 찍은 사진. 굴뚝에서 나는 연기는 안락사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살해된 환자의 시신은 화장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설은 예비군 병원으로도 쓰였는데, 10,113명도 넘는 사람이 1941년 1월부터 8월 사이 가스실에서 죽었다. 또 정신 질환을 가진 4,411명이 이곳에서 살했되었으며 굶겨 죽이거나 약으로 죽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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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0월 25일 외국인 노동자들 11명을 공개처형하는 게슈타포의 모습. 같은 장소에서 11월 10일 또 다른 13명이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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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크리미아 추정. 처형된 소련 빨치산들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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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10일. Lidice 마을 거주민들이 독일 경찰에 의해 처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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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셀, 거리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벨기에 경찰이 체포해 연행해 가고 있는 모습. 그 뒤를 독일인들이 엄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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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독일의 "조직폭력 소탕 작전" 동안에 체포된 사람들. 이들은 프랑스 남부의 저항군으로 프랑스 비씨 정부에 저항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은 비씨 정부 군대. 비씨 정부는 독일 나찌가 세운 프랑스 정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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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추정. 프랑스 남부에서 벌어진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체포된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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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22일 벨그레이드 인근. 점령군인 독일 친위대 경찰이 세르비아 계 인질을 확인 사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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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0월. 나찌는 인민의 폭풍 부대를 창설했다. 16세부터 60세 사이 남성으로 구성된 사람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참호 파기, 바리케이드 쌓기 등 "독일 제국 방어"에 참가했다. 자발적으로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 징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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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포츠담 인근. 인민의 폭풍 부대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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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 역시 전쟁이 끝나기 한달 전 인민의 폭풍 부대에 착출되어, 남자들과 같이 "제국 방어"에 참가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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