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렛첸지 기념관 Gedenkstätte Plötzensee: 나치에 저항한 독일인의 "서대문형무소"

플렛첸지 기념관 Gedenkstätte Plötzensee 정문
민족주의나 진영 논리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은 국가와 민족을 독립적 주체로 이해하는 함정에 갇혀 있거나 또는 함정에 쉽게 빠진다. 이런 태도는 국가나 민족 내의 모순을 놓치고, 안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은 잘해야 나쁜 편에 사는 착한 우리 편쯤으로 취급하고 만다. 제국주의 식민지 경험을 한 나라 사람들인 경우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지지할 수도 없다.

일본이나 북한에 대해서 제도권 정치와 주류 언론들이 퍼뜨리는 관점이 대부분 이러하다. 비슷한 처지의 독일의 경우, 오랫동안 나치와 국가 독일을 분리시키려는 작업을 해왔다물론 아무 저항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독일 정치와 언론이 그냥 해준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민족주의자들이나 진영 논리자들은 나치 독일을 도매값으로 비난하지만, 독일에 나치즘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국가적 시설들이 많은 것은 같은 노력의 결과다. (이와 정반대인 일본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으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치에 맞서 저항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전시해놓은 추모관 등의 유적과 기록을 보면, 나치의 탄압이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것을 수가 있다. 유태인 학살이 가장 끔찍한 범죄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시설을 보면 한편으로는 나치에 맞선 저항, 그것은 사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대규모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나치의 집권을 막을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을 느낄 있는 곳 중 한 곳이 플렛첸지 형무소다.

형무소는 베를린 시내에서도 전철을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가야 할 정도로 시 외곽에 떨어져 있어 불편할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시의 흔적을 있는 것들은 거의 사라졌고, 남은 것은 건물 (나치 정권 하에서 사형장으로 쓰인 건물의 일부) 작은 관리 사무소 하나 그리고 추모단과 강제수용소의 흙을 담아 놓은 항아리가 전부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수감되었던 193-40년대 ()나치 투사들의 정신을 추모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형무소는 1868년부터 1879 사이, 당시 베를린 성벽 밖이었던 지금의 위치에 처음부터 형무소로 건설되었다. 초기에는 1,200여명을 수감할 있는 시설로 트인 공간에 각종 건물이 안에 있고 이를 빨간 벽돌로 높은 벽이 둘러싼 모양새였다



내부 전경. 사진 김승현.
하지만 1933 나치가 집권한 형무소는 매우 가혹한 시설로 바꼈다. 다양한 벌칙을 있는 여러 종류의 감금 시설이 들어선 것이다. 여기에 수용된 사람들은 대부분 특별법원이나, 프러시아 지역의 고등법원 정치범 재판 등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특히 악명 높았던 재판소는 1934년에 만들어진 "인민재판"이 있었다.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 보면 나치 치하 재판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인민재판이다. 소피 숄은 나치 치하에서 비폭력 투쟁을 벌인 기독교 학생단, 백장미 운동의 일원이었던 여성의 이름으로 영화는 그녀와 백장미 운동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받은 인민재판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다시 재판하기 위한, 법전에도 없고 애초 유죄 판결밖에 나올 없는 재판이었다. 재판에 기소되는 범죄는 다양했지만 정치범들이 단연 중죄로 가장 많았고 대부분 반역죄에 해당했다.

1944 인민재판의 재판 모습. 재판관이 나치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wikipedia)
1939 이후에는 외국인들도 갈수록 많아졌는데, 이들은 대게 강제 노동을 위해 수용소로 보내졌다. (플렛첸지의 사례에서는 확인할 없지만, 전체 강제 수용소 일부에서는 연합군이 오기 이미 패색이 짙어가는 독일군을 제압한 수용소 반란이 있었는데, 여기에 스패인 내전에 참여했던 투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나치의 폭압은 갈수록 심해졌고 저항도 심해졌다. 그럴수록 플렛첸지 형무소 역시 과밀해져갔고 형무소 환경 또한 열악해졌다. 여기에 베를린에까지 연합군의 공중 공격이 들이닥치기 시작하는 1943년부터는 공공연한 처형이 이어졌는데, 연합군의 공격으로도 피해가 컸지만 틈을 이용한 처형으로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예컨대 1943 9 7일에는 전화 한통으로 처형자 명단이 전해지고 곧장 처형이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9 시기에는 길로틴이 파괴되자 목을 메달았고, 명단에 없던 사람도 처형되는 경우도 있었다. 플렛첸지 형무소에서 사망자한 사람들의 수와 그들의 국적을 보면 아래 표와 같다. 그리고 표는 사망한 이의 수와 국적을 보여줄 뿐이며,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나치에 저항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되겠다.

글, 사진: 김승현 
자료 참조: http://www.gedenkstaette-ploetzensee.de/index_e.html 
주소: Plötzensee Memorial Center Hüttigpfad D-13627 Berlin-Charlottenburg-Wilmersdorf

< 1933-45년 사이 플렛첸지 형무소에서 처형된 사람 수>
년도 처형자 수
1933  4
1934  13
1935  21
1936  7
1937  38
1938  55
1939  95
1940  190
1941  87
1942  535
1943  1,180
1944  534
1945  132
전체  2,891

<1933년 45년 사이 플렛첸지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국적과 그 수>
독일  1,437
체코  677
폴란드  253
프랑스  245
오스트리아  89
벨기에  68
네덜란드  35
(구)소련  24
유고슬라비아  14
스페인  9
이탈리아  6
리투아니아  6
스위스  4
그리스  4
루마니아  4
헝가리  3
불가리라  2
노르웨이  1
아프카니스탄  1
이집트  1
룩셈부르크  1
무국적  7
전체  2,891

자료는 2004년 현재 German Resistance Memorial Center


플렛첸지 기념관 주변의 붉은 벽돌 담. 사진 김승현.
1933-45년 나치 희생자를 추모하며 라고 쓰여있는 추모단. 사진 김승현.

강제수용소에 있던 흙은 담아 놓은 항이라. 사진 김승현.

파괴되고 얼마 남지 않은 옛 형무소 건물 내부. 사진 김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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