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전쟁은 이제 그만"


케테콜비츠 박물관, 베를린 (사진: 김승현)
독일 출신의 판화가, 조각가 케테 콜비츠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훌륭한 평가를 받는 예술가다. 그를 기념하거나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들도 베를린에는 많다. 베를린 시내 노이에바헤(Neue Wache)라고 불리는 <전쟁과 독재의 희생자 추모관>에 가면 그녀의 작품 <피에타> 상을 볼 수 있다. 피에타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작품화 한 것을 말한다. 


그녀가 결혼 뒤 오랫동안 살았던 베를린 북부의 동네에 가면 그녀의 이름을 딴 콜비츠광장Kollwitz-Platz이 있다. 그녀가 살았던 집은 전쟁으로 파괴되어 없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대신 광장에는 구스타프 사이츠Gustav Seitz라는 작가의 콜비츠 청동 전신상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그리고 베를린 시 외곽에 있는 프리드리히스펠트Friedrichsfelde(Lichtenberg) 공동묘지에는 그녀와 그녀 가족의 묘가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남편 칼 콜비츠의 죽음을 슬퍼하며 작업해 만든 청동부조가 묘비에 붙박혀 있다. 그녀의 작품들을 전시한 곳으로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는 케테 콜비츠 베를린 박물관(Käthe-Kollwitz-Museum Berlin)이다. 한 예술가의 기여로 1986년 5월에 문을 연 이 박물관은 그를 아는 사람들의 발길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도 몇 차례 전시회를 통해 그의 작품들이 소개된 적 있다.

케테 콜비츠를 이해하는 데는 그의 아들, 페터의 죽음이 매우 중요했다. 페터는 “조국” 독일을 위해 전쟁에 자원 입대해 비교적 초기에 사망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그의 어머니 케테 콜비츠는 그런 아들을 더 말리지 못 한 것을 평생 자책했다. 그의 ‘피에타’는 - 나는 감히 주장하는데 -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인간적이고 그래서 더욱 압도적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어머니”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조각했다!) 그의 다른 판화도 마찬가지다. 케테 콜비츠는 경제 위기, 나치의 전쟁 선동, 그리고 세계 전쟁이 낳은 가난, 굶주림, 죽음 등으로 고통받았던 여성(또는 어머니)과 아이들에 대해 누구보다 강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더 이상 전쟁은 안 돼!” 

그러나, 케테 콜비츠의 세계는 단지 평화주의와 모성애로 한정되지 않는다. 한 역사가가 “극단의 시대”라고 불렀던 이 시대를 이해한다면 그의 세계는 박물관과 전시회에가 지배적으로 설명하는 방식 이상이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독일은 19세기 중후반부터 급격한 산업 성장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독일의 공장은 밤낮없이 돌며 한편에서 부를 쌓아가는 자본가들을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랜 노동 시간과 저임금, 이로 인한 가난과 피폐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노동 계급을 대거 양산했다. 노동자이면서 열성적인 독일사회민주당 당원이었던 아버지와, 루터파 개신교이며 종교 탄압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 밑에서 케테 콜비츠는 화가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자연스럽게 사회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열두 살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한 콜비츠는 열여섯 나이에 아버지 주변의 노동자, 선원, 농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1891년 남편 칼 콜비츠와의 결혼이 이 같은 사회 문제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했다. 콜비츠 부부는 베를린 북부의 노동자 지구에 정착했고 남편은 그곳에서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돌보던 의사였다. 그는 나중에 이곳에서의 삶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었음을 밝혔다. 
콜비츠광장. 이곳은 콜비츠가 결혼 이후부터 나치에게 추방당할 때까지 살았던 동네에 있다.
이런 중에 그의 첫 연작 “직조공의 반란”이 태어났다. 1898년 첫 전시를 한 뒤 얼마 뒤인 1902년에는 “농민전쟁” 작업에 들어갔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1908년에야 완성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서 봉기와 반란을 선동하고 싶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았던 것은 분명했다. “직조공의 반란”은 1844년 독일, 슐레지엔 지역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었다. “농민전쟁” 역시 1524년의 실제 사건을 다룬 것이었는데, 기본적으로 가진 자들에 대한 무산자의 반란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다. 이런 작품들이, 팽창 일로에서 각종 저항을 탄압했던 빌헬름 2세 황제 정부의 마음에 들었을리 없다. “직조공의 반란”은 베를린에서 상까지 받을 예정이었지만, 정부의 반대로 수상하지 못했다.
농민전쟁 연작. 콜비츠.
1914년, 6월 사라예보 사건이 있고 난 뒤 이미 전쟁의 소문이 유럽을 지배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일은 그 해 8월 전시 동원령을 선포하며 참전했고 이때 아들 페터가 자원 입대했다. 애국주의의 열광이 온 유럽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지배한 결과였다. 이 전쟁에서 자기 나라가 곧 승리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자신감이 팽배했다. 10월 전시 경제 체제로 전체 독일이 바뀔 때즈음, 참전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아들, 페터의 사망 소식이 들렸다. 이 일은 케테 콜비츠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전쟁 지원자들. 콜비츠. 1923년 목판. 사진 김승현. 

1915년 2월 독일은 배급제로 바뀌면서 빵쿠폰이 나눠졌다. 전기도 부족해졌으며, 1916년에는 차, 커피, 비누까지 배급제를 실시해야 할정도였다. 생필품이 부족하고 가난이 일상이 되었지만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는 유래없는 강추위로 전선과 국내 모두가 혹독한 고생을 해야했다. 국내에서도 저항이 잇달았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다. 그 사이 독일 공산당의 맹아였던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만들어졌고, 러시아에서는 나중에 러시아 공산당이 되는 볼세비키가 주도했던 혁명이 성공해 노동자 정부가 들어섰다. 개혁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에 헌신적이었던 케테 콜비츠가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도 아마 이때쯤이었던 듯하다.
칼 리프크네히트의 장례식. 콜비츠. 목판. 사진 김승현. 
1918년 독일 혁명으로 전쟁이 끝났다. 국내의 파업이 전선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쟁에 지친 사병들은 전선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한 결과, 러시아에서처럼 독일에도 소비에트 운동이 확산한 결과였다. 지배자들은 물러서야 했고 사민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모든 저항을 진정시키려고 했던 사민당은 공산당이 혁명의 전진을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고 우파들을 동원해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봉기를 무참하게 진압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도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케테 콜비츠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모하는 판화를 남긴 것도 이때였다. 이때부터 그는 목각 방식을 적극 사용해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2년부터 전쟁과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제로 목판화를 연작하기 시작했고, 혁명이 고립되어 버린 러시아를 방문해 러시아 돕기에 나서기도 했다. 

1920년대 독일은 혼란의 시기였다. 원조 경제로 인한 잠깐의 호황도 누렸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을 뿐, 한편에서는 우파들의 준동이 끊이지 않으며 암살까지 자행했고, 히틀러는 1923년에 실제로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하고 감옥으로 갔다. 이런 준동들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사민당 정부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우파들이 끊임없이 사민당을 시험했지만, 기층의 노동자들이 파업과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이들을 진압했던 것이다. 그러나 1929년의 경제 위기는 이 사태를 바꿔놓았다. 실업자가 6백만 명이 될 정도로 위기가 심각했고, 먹을 것도 없고 연료도 떨어져갔다. 노동 계급 가정의 가난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케테 콜비츠가 남긴 이 시기의 작품은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게 해준다. 


나치가 집권한 1933년 1월 이후 독일은 파시스트의 광풍에 치를 떨어야 했다.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사민당과 공산당의 영향아래 있던 모든 노동조합을 파괴했으며 활동가들을 잡아 가두었다. 또한 이들은 독일 정신, 순수한 독일인을 강조하며 학문과 예술을 탄압했고 저항적인 지식인과 예술인들을 직장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작품을 불태웠다. 그리고 다시 전쟁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치가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밀어넣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전쟁은 이제 그만
케테 콜비츠는 전쟁을 통해서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고 그래서 이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가 이 시기에 남긴 “죽음” 연작은 당시의 분위기를 너무나 뚜렷이 전해준다. “죽음” 연작은 그녀 작품 활동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나온 것이었다. 1936년 나치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 활동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936년 7월, 이미 공직에서 쫓겨난 케테 콜비츠는 남편과 함께 게슈타포에게 끌려갔다. 게슈타포는 비밀리에 자국 내 반정부 활동가들의 정보를 수집해  이들을 고문한 뒤 강제 자백을 받아내고 인민 재판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버리는 나치 국가 기관이었다. 콜비츠 부부는 만약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다면 자살하기로 결심을 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미 세계적 명성을 쌓았던 케테 콜비츠를 위한 구호활동이 세계적 명사들 사이에서 벌어지자 게슈타포는 의도했던 대로 못하고 콜비츠 부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는 1940년 남편이 사망하고, 1942년 자신의 손자 페터(죽은 아들 페터의 이름을 딴 것이다)까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접했다. 그리고 1943년에는 베를린에서 추방되어, 처음에는 노르드하우젠, 이후 모르츠부르크로 전전해야 했다. 그 와중에 베를린 집이 폭격을 받아 불타버렸고 그 안의 작품들도 함께 불탔다. 케테 콜비츠는 모르츠부르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종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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