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전시관. "61-89, 베를린장벽" 전시가 열린다. '장벽'을 중심으로 사라진 동독에 대해 알 수 있는 곳이다 |
베를린에 베를린장벽(Berliner Mauer)을 직접 볼 수도 있고 그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곳이 있다. Gedenkstätte Berliner Mauer(베를린장벽기념관)이다. 옛 동독 지역에 있는 이 기념관은 당시 장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거대한 야외 박물관같다. 또 장벽이 있던 자리의 흔적을 따라 있는 시설들과 건물들은 한결같이 생생한 교육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교육일까?
1990년 10월 2일, 독일 통일 하루 전, 동베를린 측에서 지금의 소피엔 교구 공동묘지를 지나는 국경 지역을 역사관으로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이 기념관 프로젝트가 시작했다. 그러면서 장벽을 보존하고, 공동묘지도 새로 단장했으며, 장벽이 건설되고 경계가 강화되던 1960년대에 폭파된 화합의 교회도 지금 있는 자리에 새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1999년 11월 9일에 문을 열어다. 이후 꾸준히 확장을 해, 2009년에는 장벽을 탈출하려다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추모관도 열었고, 2014년 11월 9일 장벽 붕괴 25주년에 맞춰 “1961-89, 베를린장벽”이라는 이름을 단 상설전시관을 열어 지금의 기념관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서 내려다 본 옛 장벽을 보존해 높은 모습 |
장벽이 해체되기 시작할 무렵, 이곳에 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사망한 이들의 수천 기에 달하는 묘지를 이장해야 했다. 아마도 장벽을 건설하는 동안 이장하지 않은 채 그대로 건설된 듯했다. 이 십자가는 그들을 추모하는 십자가다. |
그런데 이 상설전시관이 흥미로운 곳이다. 사진과 동영상, 유물들을 동원한 연대기식 설명들이 정말이지 장황하고 디테일하다. 하지만 시간 순서에 맞춰진 전시 방향을 쭉 따라 가다 보면, 한 가지 결론을 얻고 나온다. 자유가 없던 사회, 자유를 가로 막았던 장벽은 붕괴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문제는 자유다! 그리고 이 전시관은 장벽을 넘어 탈출한 동독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진다. 그러니 옛 동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한다. 옛 동독 사회에 대한 단편적 지식이나마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독 측 장벽과 장벽 사이에 있던 철침판, 동독 탈출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부상자가 꽤 나왔다 |
그런데, 내가 흥미롭다고 하는 것은 옛 서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장벽은 단지,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동독과 옛 소련 만의 못 된 의도의 결과였던가. 동서 분단, 냉전 이것에 대한 해석이 단지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냉전과 분단의 책임을 패자에게 돌려도 되는 것인가. 궁금해진다. 상설전시관이 흥미롭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은 따로 마련해야겠다. 일단 지금은 장벽과 장벽 뒤의 동독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시 이곳을 방문할 사람이라면 미리 알고 가야할 게 있다. 내부의 모든 설명은 독어와 영어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신이 영어도, 독어도 안 되시는 분이라면, 지금 이 기사를 꼼꼼히 읽고 가기를 권유한다.
1945년 Torgau 인근 엘베 다리 위에서 미군과 소련이 만나고 있는 모습. |
장벽의 이야기는 나치의 패전에서 부터 시작한다. 연합군은 독일과 베를린을 넷으로 쪼개 미영프소 네 나라가 관리키로 했다. 그러나 이들의 점령 지역은 곧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두 곳으로 분할되었다. 1949년 5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미,영,프가 관할하는 서부 지역에서 만들어졌고, 독일민주공화국이 1949년 10월에 소련 관할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수도였떤 베를린 이에 따라 둘로 갈렸다. 냉전의 시작이었다.
이후 소련은 서방 지지 세력을 도시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1948-49년에 걸쳐 서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시작했다. 이는 서베를린을 서독에서 분리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소비에트 군 당국의 지원을 받아 SED(통일사회당)이 도시 동부를 장악했다. 이렇게 해 지방 의회와 지방 정부 역시 각각 동과 서로 나눠서 구성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소비에트 점령지역 내 행정 중심지였던 동베를린이 1949년 동독의 수도가 되었다. 서방 강대국들 역시 이를 상대로 서베를린을 계속 지원했다.
베를린이 이렇게 나눠졌지만 그 초기만 해도 일상 생활에 영향은 별로 없었다. 이후 사회 인프라를 관리하는 시스템 역시 둘로 나뉘었는데, 쓰레기 수거가 1948년에, 전화선은 1952년에, 트램은 1953년에 갈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베를린 사람들은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다. 점차 이런저런 방식으로 분할이 낳은 효과가 삶을 번거롭게 하면서 종종 갈등의 소지가 되기도 했다. SED는 특히 서베를린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고, SED는 장벽 건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거꾸로 서베를린에서 정치가와 언론들이 동베를린에 가서 쇼핑을 하거나 돈을 쓰는 것을 비난했다.
1953년 10월 6일 Zehlendorg의 지하철역(서베를린) 앞에 승객들에 대한 경고 표시. 지하철은 동독 국영철도의 소유였지만, 베를린 전체를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경고표시로 승객들이 동독으로 가는 여행을 말렸다. 경고표시에는 "지하철을 타고 계속 가시면 감옥으로 갈 수 있습니다" |
1946년에 선거가 있었다. SED는 압도적 다수당이 되는 데 실패했지만, 소련 점령군의 도움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대신, 다른 정당들을 탄압했다. 1952년 SED 지도부가 “사회주의로 가는 경로”를 발표하고, 기업, 자영업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배척하고 농업을 강제 집산화했다. 이 같은 위로부터의 고강도 개혁으로 수십만 명이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며, 1953년 6월 17일 시위가 실패하고 나서는 점정을 이뤘다. 서베를린으로 피한 난민들의 대피소도 급증했다. 1953년 6월 17일 시위는 동독 지역 전체로 퍼져갔다. 시위대들은 정부 퇴진과 자유 선거를 요구했다. 이에 베를린 소련 주둔군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소비에트 탱크가 이 저항들을 짓밟았다.
1953년 6월 17일 포츠다머플라츠에 진군한 독일 탱크(위)와 1953년 6월 17일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시위(아래) |
1952년부터 실시된 농업생산협동조합(LPG)은 SED의 대대적 선전으로 진행되며 농민들의 가입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부터는 가입하지 않던 농민들까지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로 인해 이제 농민들의 탈출이 뒤따랐다.
1961년 10월 1일 열일곱 청년이 서베를린 경찰의 도움으로 장벽을 넘고 있는 모습 |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SED 지도부는 장벽을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장벽 계획은 탈출자를 더욱 급증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동독 지역 사람들이 서쪽으로 계속 탈출했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은 서베를린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데, 가짜 통행권, 차량 제공, 터널 탈출 등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는 위험이 따랐다. 국경 수비대에게 도망자에 대한 총살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때문이다. 동독인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1962년 8월 17일 장벽을 넘으려다 수비대의 총에 맞아 부상당한 Peter Frechter가 동독수비대에게 잡혀 끌려내려오고 있다. 그는 여기서 사망했다. |
장벽 건설은 동서 양쪽 사람들 모두를 분노하게 했다. 동베를린, SED정권은 모든 시위를 진압했다. 서베를린 사람들 역시 이에 항의했다. 1962년과 1963년의 격렬한 시위들로 인해 서베를린 의회는 장벽 근처에 경찰을 배치해 서베를린 사람들을 막아 세웠다. 시위대 중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노로 사람들이 국경 수비대에게 돌, 병 을 던지며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장벽에 폭탄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1961년 6월 3-4일, 미소 정상이 비엔나에서 만났다. 이 만남은 1957년 소련이 베를린을 동독에 귀속시키라고 요구하면서 발생한 두 번째 베를린 위기의 전환점이 되었다. 1961년 8월 케네디는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장벽이 전쟁보다 훨씬 좋기는 하다” 하고 말했다.
1961년 8월 28일 동독 국경 수비대가 물대포를 사용해 장벽 서쪽에 있는 시위대를 해산하고 있다 |
1961년 8월까지만해도 베를린이 영구적으로 분할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SED는 재빨리 장벽을 세우며 주변을 요새화했다. 이렇게 해서 서베를린은 동독 한 가운데 있는 장벽에 둘러쌓인 섬같은 도시가 되고 말았고, 서방의 지원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되었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동쪽에 사는 친구나 가족들과도 완전히 단절됐다. SED 처지에서는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과 미국의 처지에서도 장벽 건설로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을 둘러싼 두 세계의 분단은 영구적이 되었다.
1964년 6월 18일 Harzer Strasse 지역의 장벽 |
1961년 9월 20일, Erich Honecker는 한 회의 자리에서 “국경을 넘는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장벽의 설치로 인해 적어도 138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족 중 일부는 자기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채 동독이 붕괴한 뒤에야 알기도 했다. 사망자들은 범죄자로 분류되었고, 그 가족들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89년 2월 이후 이런조치는 사라졌다. Chris Gueffroy가 장벽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이 비밀리에 치러질 수 없었던 것이다.
1965년, "주민봉사단"과 군인이 함께 순찰을 돌고 있는 모습 |
동독은 탈출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비밀 경찰을 두어 주민들을 감시했고, 경찰과 국가 기관들이 협조했다. 경찰 감시와 “주민봉사단”은 장벽 주변에 의심스러운 사람들이면 누구나 검문할 수 있었고, 장벽 주변은 갈수록 무장을 강화해갔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은 탈출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탈출자에 대한 사격 명령을 받았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자기가 맡은 근무 지역에서 탈출자가 없기를 바랐고, 만약 탈출자가 있을 때는 일부러 총알이 비껴나가게 쏘기도 했다. 또 사람들은 탈출자를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 하고 지켜보고 있기도 했고, 역시 명령에 따라 주저없이 총을 쏘기도 했다. 이런 군인들은 술을 많이 마셨고, 탈영하기도 했다.
서독의 자유주의 정권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 동독과 몇 개 조약을 맺었다. 1971년 베를린에 관한 4개국 협약은 그 중 하나였는데, 이 협약에 따라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에 이동에 관한 규제가 마련되었다. 같은 해 서독과 동독은 협약으로 이동협약을 더욱 구체화했다. 1972년 6월, 서베를린 사람들은 동베를린이나 동독에 입국 승인을 신청할 때 여행 목적을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점차 많은 서독 사람들이 이를 이용해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호네커의 새로운 경제, 사회 정책은 동독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정권 안정을 찾아줄거라 생각됐다. 그래서 식량 가격, 집세, 난방비, 전기세 등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독의 이런 과정들 때문에 과세 수준이 매우 높았고, 이는 다른 정책에 더해 동독을 위기로 몰고 갔다. 예를 들어 바지 한 벌을 사기 위해 몇 주동안 기다렸지만 구하지 못해 허락을 받고 베를린까지 다녀와야 했다.
경제 위기에 더해 환경 위기도 심각했다. 80년대부터는 동독의 대기 오염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는 사람들의 건강을 해쳤다. SED 지도부는 이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자 이것이 동독 젊은이들을 행동에 나서게 만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사람들의 주위를 끄는 불법 시위를 벌인 것이다.
환경 오염을 일깨우기 위한 불법 자전거 마스크 시위 |
동독은 1962년 징병제를 도입했다. 젊은 사람들은 징집을 거부하기도 했다. 1964년 초에는 의식적인 징병을 거부한 사람들은 공병부대로 배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징집 자체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감옥에 갇혔다. 1986년 경 이같은 의식적 징병 거부자들이 “징병 거부자 협회”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건설했다. 1989년 이 협회는 17개 지역 지부를 가질 정도로 성장했고, 동독의 병영화를 비난하거나 군비 경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1988년 동베를린. 징병거부자 협회가 주최한 평화 워크숍에 차려진 정보센터. 1982년 부터 이들은 해마다 평화 워크숍을 열어 다른 정치대안그룹들을 초대했다. |
유럽안보와협력회의 (CSCE)가 열렸던 1975년 이후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동독도 여기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기로 했고, 그 조치로 가족들의 만남을 허락하기로 했다. 그러자 대략 동독 거주자 2만명이 서독의 가족과 살겠다고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로 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했다. 정부가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 신청은 꾸준히 늘어, 1977년부터 1989년 사이 대략 3십만 건의 이주 신청이 있었다. 이중 어떤 사람들은 단체를 만들어 공개 신청을 하기도 했다. SED와 비밀경찰들은 이를 반정부 조직으로 보고 탄압했다. 사람들의 이주 신청 사유는 다양했다. 그러나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가족과 친구를 영원히 떠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80년대 내내 이주 신청을 했다. 공부를 계속 하겠다는 이유 등은 부정되면서 일터에서 괴롭힘을 받기도 하거나 직장을 못 구하기도 했다. 이주 신청을 하고 거부당한 사람들은 이런 괴롭힘을 받은 뒤 곧 재정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런 이들이 주로 단체를 형성해 공공연히 이주 신청에 나섰던 것이다. SED와 비밀경찰은 이런 그룹들이 미칠 영향을 두려워해, 심한 탄압을 했다. 예컨대 어떤 부부는 침대보에 “여기서 떠나고 싶다”라고 쓴 배너를 발코니에 걸어놓기도 했는데, 이 부부는 체포되어 1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떠나고 싶다" |
1963년 봄부터 서독 정부는 동독의 정치범 약 3만3천 명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을 시켰다. 동독에서는 이들을 버스에 태워 서독에 내려주었는데 어디로 갈지는 SED와 비밀경찰만 알고 있었다. 동독 정부가 받은 액수는 30억 마르크 정도가 된 듯하다. 1980년대의 이런 정치범들은 대다수가 탈출하려다 잡힌 사람들이거나 이주를 바랐던 사람들이었다.
서독으로 석방되는 동독 정치범 |
1989년년 10월 7일은 동독 건설 40주년 행사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수천명의 사람이 전국적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새로운 인권법인 "뉴포럼"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SED는 이를 억눌렀다. 일반 경찰과 비밀경찰들이 시위대를 몽둥이와 물대포로 진압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연대가 늘어났고, 시위는 커졌다.
1989년 10월 7일 시위 |
1989년 여름,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으로 뛰어들어 시위를 벌이며 망명을 요청했다. 대략 6천 명에 이르렀다. 대사관을 점거한 사람들에게는 텐트와 위생 시설들을 마련해줬다.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와 협상하고 망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결정은 9월에야 나왔다. 이들은 서독으로 떠났다. 허가가 나오자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대사관으로 망명 신청자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 점거 시위 |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의 칼리프크네히트 거리에서는 언론, 푠현,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는 거대한 시위가 열렸다. 그리고 장벽은 무너졌다.
1989년 11월 9일 브란덴브르크 게이트에 있는 장벽위에서 만난 동서베를린 사람들 |
11월 10일 이튿날 아침, 세계 언론이 이곳을 집중 방송했다 |
글, 사진: 김승현
주소: Gedenkstätte Berliner Mauer, Bernauer Str. 111, 13355 Berlin
입장료: 무료, 개관시간: 10-6시. 휴관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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