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몽마르뜨: 파리코뮌의 첫 전장

몽마르뜨 언덕 밑에 있는 물랑 루즈(빨간 풍차). 초창기 모습과 달라진 것은 없다. 사진 김승현.
몽마르뜨! 보헤미안과 예술을 사랑하는 유럽인들의 마음의 고향, 물랑루즈, 낭만의 언덕. 혹시 이런 것들이 연상된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몽마르뜨의 반만 알고 있다.

몽마르뜨라는 이름은 원래 전쟁 신의 산(Mount of Mars)에 어원을 두고 있었지만, 서기 3세기 경 - 파리의 수호 성인이 된 - 성 디오니시우스가 이곳에서 참수당한 뒤에 순교자의 산(Mount of Martyr)으로 그 어원이 바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의 순교 이야기가 실제 사건인지는 분명해 보이지 않지만.)

이 높이 130미터에 이르는 작은 산에 올라와보면 파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세느강이 어디쯤에 있는지 - 건물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강 주변의 이름난 건물들로 - 금방 알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쯤 파리에 머물렀던 프리드리히 슐즈(Friedrich Schulz)라는 사람은 당시 이 몽마르뜨 언덕에 올라 파리를 내려다보면서, "파리는 풍차, 여름 별장, 나무들로 이뤄진 크고 작은 언덕들이 둘러쌓은 곳으로, 사람들이 이 집 저 집 뛰어 넘어 다녀도 될 정도로 마치 타일들이 세느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것 같다"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파리가 그만큼 작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몽마르뜨가 그만큼 좋은 전망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파리 전경. 사진 김승현.

성 디오니시우스의 순교 이야기 때문인지, 프랑스의 가톨릭 왕은 이 일대를 왕립 수도원으로 만들고 성지화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는 분노한 파리 사람들이 이 곳까지 올라와 그 수도원을 파괴해버렸지만 말이다. 수도원 말고도 이 인근에 돌이 많아 채석장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넓직한 포도밭도 유명했다.

수도원, 채석장, 포도밭, 확실히 몽마르트가 도심에서 떨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동묘지도 만들어졌다. 1825년 1월 1일 비싼 장례 비용, 상하수도 오염 등의 문제 때문에 파리 외곽에 몇 곳의 공동 묘지를 만들던 때였다.(그러나 파리의 몇 차례 대규모 봉기와 정부 진압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 공동 묘지에는 에밀 졸라가 판테온으로 가기 전인 2008년까지 묻혀있던 곳이었고, 유명한 화가 드가는 여전히 여기 묻혀 있다. 프랑스 혁명의 이름 없는 전사나 또는 공포 정치 시기 반동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이 곳에 묻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수도원은 비록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아주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다. 상삐에르데몽마르트(몽마르뜨 베드로 성당)가 그것이다. 이 교회에서 이그나시오스 로욜라가 예수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성 디오니시우스를 찾는 사람들의 성지 순례 장소가 되는 곳이다. 그러나 정작 관광객들의 관심이 머무는 곳은 이 교회가 아니라, 그 건너편에 있는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이다. 높이로 치면 언덕의 높이를 포함해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파리의 스카이라인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곳 가운데 하나다. 이 교회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지고 난 뒤 - 어쩌면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난 뒤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 지도 모르는 - 1876년에 만들어졌다.

그런 이곳이 파리코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제 파리코뮌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19세기 후반까지, 말했듯이 몽마르뜨는 꽤 외곽에 해당하는, 일종의 시경계같은 곳이었고, 예술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물랑루즈 같은 유흥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곳이었다. 오히려 좋은 전망 덕분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예를 들면 1590년, 종교 전쟁 중 앙리 4세(나중에 퐁네프 다리를 만든 왕)가 가톨릭교도들로부터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파리를 겨냥해 대포를 설치했던 곳도 이곳이었고, 1814년 파리 전투에 러시아 군이 파리 폭격을 위해 점령한 곳도 이곳이었으며, 1871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때 프랑스 정부군이 프러시아 공격을 대비해 대포를 쌓아둔 곳도 이곳 몽마르뜨였다. 이 대포들은 이후 1871년 3월 18일, 몽마르뜨에서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으로 이어지는 첫 행동의 배경이 되었다.

파리 코뮌


1870년 7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프러시아 - 프로이센이라고도 불리며, 나중에 독일이 된다 - 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막 승리한 직후였으며, 프랑스의 유럽 패권에도 도전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직전까지, 나폴레옹 3세는 인도차이나, 베트남, 중국, 멕시코, 미국 내전(남북전쟁) 등 각지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치루고 있었고, 동시에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스페인, 룩셈부르크, 벨기에에 대한 패권을 확대하려 애쓰고 있었다. 둘의 대결은 어느 정도 불가피해 보였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비스마르크의 군대는 강력했다. 1870년 9월, 선전포고 후 두 달만에 프랑스 스당에서 벌인 전투에서 나폴레옹 자신을 포함한 부대 전체가 프러시아군에게 포위,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의 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곧 임시정부(이 정부부터 제3공화정이라고 부른다)가 수립되었다. 파리는 프러시아에게 포위된 채 홀로 다른 프랑스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 '파리 포위'라고도 불리는 이 시절 파리민중들은 끔찍한 고통, 기아와 추위를 겪었으며 심지어 고양이까지 식용으로 삼을 정도였다. 몇 년 전 '레미제라블'을 썼던 빅토르 위고도 이 시절 파리에 있었다. 1871년 1월, 프랑스의 지배자들은 프러시아의 '파리 포위'에 결국 굴복했고,  비스마르크는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항복한 프랑스 임시 정부는 1871년 1월 28일, 독일과의 휴전조약을 체결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할 권한 있는 의회를 2월 13일 구성했다. 이 의회는 지방의 왕당파들이 다수였다. 그리고 아돌프 티에르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들에게 공화주의의 심장, 혁명의 도시 파리는 위험해 보이기만 했다. 그래서 파리가 아니라 베르사유에 정부를 옮겨 세웠다. 파리를 버린 제3공화국의 지배자들은 3월 1일, 독일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의 내용은 프랑스가 전쟁 배상금뿐만 아니라, 동부 프랑스에 독일군을 주둔하게 하는 비용까지 물게하며 동시에 알자스와 로렌의 절반을 독일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 때의 알자스와 로렌은 나중에 유명한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었다) 전쟁을 원했던 자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배자들이었지만, 전쟁 배상을 하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다시 한 번 프랑스 민중이 되어야 했다. 파리 시민들은 분노했다.

프랑스 지배자들은 스스로 군대를 무장 해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파리에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국민방위군이 여전히 무장한 채로 있었고, 엄청나게 많은 대포가 몽마르뜨 언덕 위에 고스란히 국민방위군의 수중에 있었다. 티에르는 비누아(Vinoy)장군에게 대포 탈취의 책임을 맡겼다. 비누아는 파리를 적들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비누아는 대포만 신경쓰지 말고, 반란 지도자 모두를 즉각 체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으며 이미 좌파 활동가들의 명단까지 가지고 있었다.

비누아의 군대가 3월 18일 새벽 세 시, 야밤을 틈 타 몽마르뜨로 갔다. 대포 탈취는 생각보다 쉬울 수 있었다. 방어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흥분한 비누아는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사유에 전보를 보내, 작전이 성공했다고 알렸다. 아뿔싸!! 그런데 대포를 운반할 말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 결국 아침까지 군대는 몽마르뜨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의 주둔을 알아차린 파리 시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저 대포가 베르사유 군대의 손에 넘어가면 곧 저자들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절박했다. 파리코뮌의 전사, 루이 미셀은 이렇게 썼다.

“몽마르뜨에 아침이 오자 북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언덕 위로 갔다. 해가 뜨고 있었고 종소리가 들렸다... 꼭대기에 있던 군대는 이미 전투 태세였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 남자와 군인도 있었지만, 여자와 아이들도 많았다 - 대포와 기관총을 향해 달려들었다. 군대가 대포들을 밤새 연결해 묶어 놓은 덕에 대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장군 하나가 “사격 개시”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한 장교가 장군보다 더 큰 목소리로 부대에게 “총을 들어 개머리판을 세워!” 하고 외쳤다. 병사들은 시키는 대로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장교는 나중에 총살당했다. 독일에게 항복한 뒤 오히려 파리를 적으로 보았던 베르사유의 지배자들에 맞서 파리 사람들이 몽마르뜨를 지키고, 자신의 운명을 지키는 첫 날은 이렇게 밝았다.

그러나 파리 사수는 오래 가지 않았다. 코뮌은 같은 해 5월, “피의 주간”을 겪고 무너졌다. 엄청난 대량 학살이 이 때 일어났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정부, 파리코뮌이 프랑스와 독일의 지배자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예술가의 고향


파리코뮌의 첫 전투가 있던 몽마르뜨는 그 전까지 공동묘지와 오래된 교회와 포도밭이 있던 곳으로 유명했다. 그뿐이었다. 화가들이 모여들었다는 몽마르뜨는 파리코뮌의 패배 후였다.

나폴레옹 3세 통치 시절인 제2제정, 그는 오래되고 좁아터진 파리를 개조해보기로 작심을 했다. 그에게는 파리의 좁은 골목사이로, 봉기 때마다 만들어지는 바리케이드를 만들 수 없게 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이란 사람이 이 공사를 맡았다. 대규모 공공 공사였던 이 사업은 1853년부터 1870년까지 꾀나 오랫동안 이뤄졌는데, 지금의 파리 모습은 대부분 이 공사의 결과물이다. 공사 기간이나 비용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프랑스 제국주의의 팽창 덕분에 어느 정도 감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점차 달라져가는 파리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부담이 되어 갔다. 그때까지 파리 라틴지구에 모여있던 예술가들로서는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이 찾아낸 곳이 잠자는 듯 조용한 동네 몽마르뜨였다. 파리코뮌이 패하고 난 뒤 1870년대 말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몽마르뜨는 유흥과 환락의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1889년 10월 6일, 저 유명한 물랑루즈가 문을 열었고, 갑자기 몽마르뜨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카바레, 물랑루즈의 상업적인 성공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 좁은 골목과 거리, 낮은 집들, 이런 저런 문화가 섞인 보헤미안 풍의 분위기, 그리고 파리를 떠나 잠깐 쉬며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오스만의 파리가 아닌, 몽마르뜨로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영화 <물랑루즈>는 이 시절의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 몽마르뜨에 가면 파리코뮌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높다란 교회, 예술, 물랑루즈와 프랑스캉캉, 풍차와 이들을 찾는 관광객들뿐이지만, 그럼에도 몽마르뜨가 세계 첫 노동자정부의 전투의 첫 격전지였다는 것을 잊지 않는 곳이 있다. 몽마르뜨 박물관이다.

(참고 문헌: "The Paris Commne: A Revolution in Democracy" by Donny Gluckstein. Haymarket Books 2011, "Paris: Capital of Europe" by Johannes Willms. Holmes&Meier 1997)

몽마르뜨 공동묘지의 입구. 사진 김승현.

몽마르뜨 공동묘지 내부의 모습. 한 때 에밀 졸라가 있었고 지금도 드가가 이 곳에 묻혀 있다. 사진 김승현.
몽마르뜨로 올라가는 언덕 길. 가운데 끝에 보이는 곳이 유명한 성당. 사진 김승현.
성피에르성당.베드로성당이다. 사진 김승현.
몽마르뜨의 겔러리 거리. 지금은 겔러리보다 식당이 더 많다.사진 김승현.
몽마르뜨 박물관 안에는 1871년 당시 몽마르뜨에 있던 대포들의 사진이 있다. 이 대포는 1871년 파리코뮌의 화근이 된다. 사진 김승현.
1871년 파리코뮌의 전사들. 몽마르뜨의 언덕 위 대포를 지키고 있다.  사진 김승현.
몽마르뜨 대성당과 그 옆 베드로 성당. 사진 김승현.
박물관 정문. 이 박물관은 몽마르뜨의 역사를 많이 전시하고 있어 꼭 가볼만 하다. 사진 김승현.
유명한 갈레트의 풍차, 옛날에는 카바레였지만 지금은 식당이다. 사진 김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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