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터덴린덴 대로에 있는 건물 입구의 모습. 독일의 근대 국가로 가는 비교적 꽤 초기, 베를린을 멋지게 꾸미려던 시도의 결과다. 사진 구글이미지 캡쳐. |
이 모든 일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지만, 피하지 못했기 때문에그 교훈의 값은 비쌀 수밖에 없다. 그 많은 피와 눈물, 죽음과 고통. 그 독일 역사를 추모하고 교훈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그 중 아무 설명은 없지만 그 무게감이 남다른 곳을 소개한다면, 바로 베를린의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 대로 위, 독일 역사 박물관과 훔볼트 대학 사이에 있는 노이에바헤(Neue Wache)가 있다.
그리 크지 않지만 고풍스러움에 궁금함을 안고 들어가게 되는 이 건물은 독일이 지금까지 거쳐온 역사를 그대로 안으며 그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건물은 독일 국민 국가의 상징 중 하나였다. 이 시기 프러시아는 독일이라는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막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당시 국왕 프레드리히 빌헬름 3세가 왕궁 보호를 위한 포병대를 두기 위해 칼 신켈이라는 사람에게 지시해 건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 곳은 더이상 왕국의 군대를 위한 건물이 아니었다. 독일 민중은 그 자신의 힘으로 왕을 쫓아내고 공화국을 세웠다. 그리고 1931년 이 곳을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때 천장에 둥근 구멍을 뚫어 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로마의 판테온도 원형 돔 천장에서 햇빛이 들어오는데, 로마 판테온의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강렬한 느낌은 남다르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한 뒤, 전사자를 위한 추모는 전쟁 영웅화로 바꼈다. 이전까지는 특정 일에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추모를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치 정권은 추모일에 조기 사용을 금지하고 아예 국경일로 변경, 의식을 갖춘 국가 행사로 바꿔버린 것이다. 노이에 바헤는 나치의 전쟁 영웅화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종전을 앞두고 연합군의 베를린 폭격에 의해 노이에바헤는 파괴되다시피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독일 전체를 넷으로 쪼개 점령했다.(크게는 미국과 소련 둘) 수도였던 베를린 지역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는데, 건물이 있는 미테(Mitte)지구는 스탈린 진영에 속했다.
분단이 되고 난 뒤인 1957년, 동독 정부는 노이에바헤를 개축하기 시작해, 1960년에 ‘파시즘과 군국주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관’으로 다시 열었으며 다시 십여년 뒤 한 가운데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두고 이름 모를 군인과 나치 수용소 피해자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또 동독의 ‘프리드리히 엥겔스 의장대’ (칼 마르크스의 동지이자 혁명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두 명이 이 곳을 지키도록 해 1990년까지 매주 수요일, 추모식을 했다.
통일 이후, 1993년부터 노이에바헤는 ‘전쟁과 독재 희생자를 위한 독일 연방 공화국 추모관’으로 쓰였다. 그리고 건물 안 한 가운데에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를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장에 뚫린 구멍 때문에 비, 눈이 내리는 날은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 안긴 죽은 아들의 발끝에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와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Den Opfern Von Krieg Und Gewaltherrschaft” (전쟁과 독재의 희생자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천장에서 내리는 빛이 따스해보이지만, 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더욱 슬퍼 보인다. 눈 비를 맞으며 어머니가 아들을 감싸고 있는 그 모습때문이다. 사진 김승현 |
누군가 장미를 올려다 놓았다. 장미 아래에는 '전쟁과 독재의 희생자들' 하고 써있다. 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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