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 감옥은 성난 파리 시민들이 해체해 버렸다. 텅비었던 그 자리는 1830년 혁명 기념탑이 서있다. |
바스티유는 요새라는 뜻의 바스티드(Bastide)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1370년에, 잉글랜드의 공격에 대비해 파리 성벽으로 쌓은 것이었고 이때는 요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요새도 독립적인 건물로 남으면서 바스티유로 변했다. 17세기에는 국가 형무소로 쓰였는데, 주로 중범, 정치범, 간첩 등을 수감했다. 이들 대부분은 왕의 직접 명령으로 재판 없이 갖혔는데, 감옥의 높이와 주변의 넓은 해자 때문에 탈출이 쉽지 않은데다 음산한 느낌마져 주었다.
18세기 말, 프랑스는 잦은 전쟁과 경제 위기까지 겹쳐 있었고 1788년 8월에는 왕이 부분적 파산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가난과 궁핍으로 왕과 귀족, 성직자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높아져갔지만, 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추가적 세금을 걷기 위해 노력했다. 왕은 귀족 회의를 연이어 열었지만 뚜렷한 답을 얻지 못했고 결국 1789년 1월, 삼부회의를 열기로 한다.
왕의 바람은 세금을 걷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부회의가 열리고 논쟁은 왕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삼부회의 목적은 왕이 달라는대로 마냥 돈만 댈 수 없으며 헌법을 만들어 법에 따라 하자는 것이었다. 선대왕 루이 14세가 스스로를 국가라고 불렀듯이 루이 16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왕과 삼부회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다.
급기야 6월 17일, 삼부회가 스스로 “국민의회”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더니 6월 20일, 왕이 사용을 금지한 테니스코트 장에 모여 ’맹세’를 하며 새 헌법 제정을 요구할 때까지 삼부회 중 누구도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한다.
왕은 양보하는 척하다가 곧이어 파리를 포위하고 병력을 배치하며 7월 11일, 개혁적 장관 자크 네케르를 해임해버렸다. 이튿날인 7월 12일, 성난 군중이 튈르에 궁으로 쳐들어갔지만 왕을 만날 수는 없었고 사람들은 더욱 화가 났다.
이미 이전에 바스티유의 군사 책임관 베르나르 조르당 데 로네(Bernard-Jordan de Launay)는 바스티유가 혁명가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직감해 병력 배치를 요구했고 그래서 스위스 용병 부대 하나가 7월 7일 도착했다. 로네는 추가적으로 포병 82명과 대포도 배치했다. 당시 감옥에는 죄수가 많지 않았는데, 그 중 몇 안 되는 죄수 중 한 명이었던, 사드 후작은 창문 밖으로 “죄수들이 대량 학살당하고 있다. 와서 사람들을 풀어주시오” 하고 외쳤다고 해서 정신병동으로 이감되기도 했다. 그리고 7월 12일, 한쪽에서 사람들이 튈르에 궁을 쳐들어가고 있을 때 로네는 파리 병기고에서 상당한 화약을 바스티유로 옮겼고 - 그 바람에 파리 병기고가 방어에 취약해졌다. - 해자 위 도개교 두 개도 올려버렸다.
7월 13일, 머스킷 총을 든 혁명가들이 바스티유 탑을 지키고 선 군인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하며 전투가 시작했다. 이때 바스티유 앞마당을 빼앗았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파리 병기고와 다른 무기고로 사람들이 몰려가 머스킷 총을 대량 탈취했다. 이제 역사적인 7월 14일, 아직 새벽이지만 전날 탈취한 머스킷 총, 칼 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바스티유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혁명가들은 바스티유 안으로 대표를 보내어 로네에게 항복하고 왕에게 함께 맞서자고 했다. 그러나 로네는 거절했다. 혁명가들이 다시 대표를 보내었다. 로네는 사람들에게는 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대포에 화약이 들어있지 않다고 안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 가운데 수백 명이 바스티유의 해자를 건너 담과 도개교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 몇 명이 도개교 하나를 끌어내리는 것을 본 로네가 사격을 명령했다. 사격이 시작되고 이 자리에서 백여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사태는 악화되었다. 오후 세 시경, 탈영병 한 무리가 사람들 속에서 나타나 대포 다섯 개를 끌어내 바스티유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로네는 백기를 들고 나와 성을 포기했고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대신 화약과 대포를 얻은 사람들은 감옥 안에 있던 죄수 일곱 명을 석방했다.
같은 날 저녁, 절대 왕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를 해체해 버릴 생각을 품은 피에르 프랑수와 팔루아(Pierre-François Palloy)는 자기 사람들을 시켜 바스티유를 해체해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것들을 기념품으로 만들어버렸는데 특히 바스티유의 벽돌들을 조각해 실제와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심지어 루이16세와 미국의 첫대통령 조지 워싱턴에게까지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팔루아는 프랑스 혁명으로 장사를 한 최초의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바스티유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현재 바스티유가 있던 자리인 바스티유 광장에는 1830년 7월 혁명 기념비가 서있다, 당시 혁명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며 그 정신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바스티유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주소: Place de la Bastille, Paris, 프랑스
사진: 김승현
감옥이 있던 자리에 프랑스은행이 들어서 있다. 감옥이 있던 흔적은 많지 않지만 지하철 역에 건물 기단이 남아 있다. |
거리에 건물의 터가 남아 있다. |
세느 강위 이 다리는 바스티유 감옥의 벽돌로 만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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