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豊島): 황해의 슬픔

 황해와 풍도 

바다빛이 누렇다고 하여 황해라고 불리는 한반도 서쪽의 바다, 서해. 중국의 황화, 요하, 양쯔 등 주요 강들이 대륙의 흙과 함께 흘러와 누렇게 보였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이곳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수심이 평균 40미터로 가장 깊은 곳도 100미터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갯벌이 발달했으며, 조수 차가 크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썰물 때면 갯벌 생물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곳 가운데 이번에 간 풍도는 면적 1.84㎢, 해안선 길이 5.5㎞. 100세대, 200명 미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해안선 역시 단순하고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 176미터에 지나지 않다. 산을 돌아보는 데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 



(사진: 길잡이. 서쪽으로 지고 있는 해. 북배에서 바라본 석양)

섬의 역사 

풍도라는 섬의 이름은 1914년부터 수산 자원이 풍부하여 풍도豊島라 불렀다거나 또는 섬이 풍년이 나길 바라 풍도라 불렀다고도 한다. 소개하는 곳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전에는 단풍나무 풍()자를 썼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단풍 나무가 그렇게 많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단풍이 지는 가을에 왔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이 섬에는 단풍나무가 아닌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 더 눈에 들어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661년(신라, 문무왕 1)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돌아가던 중 풍도의 경치에 반하여 머물며 (이 단풍나무를) 심었다는 전설과 조선 중기 인조(仁祖)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한양에서 공주로 파천(播遷)할 때 들러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전설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옛부터 중국을 오가거나 하는 뱃사람들이 멀리서 이 은행나무를 보고 풍도임을 알아봤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그러나 왜 하필 당나라나 청나라같은 침략국들에 의해 평범한 사람들이 생명과 가족을 잃어야 했던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사진: 위키페디아 "1894년 8월자 고바야시 기요치카가 묘사한 풍도 해전")


그렇게 보면 풍도와 얽힌, 이런 종류의 역사적 상처는 하나가 더 있다. 1894년 청일전쟁이 그것이다. 당시 청나라 해군과 일본의 해군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서로에게 화력을 퍼부었던 것이 결국 확전이 되어 무고한 조선 백성(그 중 압도 다수가 동학교도와 이들과 함께 항거한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 작은 섬이 어쩌다 그런 흉흉한 사건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거나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찾아보고 공부해야 할 대목이다.  


섬사람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고 깍아지른 듯한 바위덩어리 섬을 기억하고 그 역사를 찾고자 할까. 여기 섬 사람들은 섬의 자연적 환경 덕분에 섬 동북쪽 해안가에 집중해 살고 있다. 반나절이 걸리지 않는 섬 일주 시간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나이든 이들뿐이고, 5. 60세 되는 예닐곱명의 부인들이 한데 어울려 김장을 담구고 있는 모습은 그나마 역동적이었다. 헌데 그들이 웅성웅성 모일 수 있는 광장 구실을 하는 곳은 풍도항뿐인 듯한데 이 여성들이 이 섬의 청년은  아니길. 하지만 바람과 달리 대부분 산업화한 나라들의 농어촌이 다 이런 모습인 것도 사실이니 무얼 더 바랄까. 도시로 나간 자녀들은 도시에서 집 사고 차 사고 거기서 새로운 뿌리를 내린다.  어쩌면 해변가 조립식 주택에 사는 - 내게 그 집 물을 퍼갈 수 있게 해준  - 여든은 돼보이는 할아버지 집 앞, 방금 나와 함께 배타고 들어온 외제차를 탄 젊은 처자와 그 자녀들도 그런 전형일 것이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런 젊은이가 아닌가. 그런 이 섬에는 학교라고는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 하나뿐이었으며, 녹슨 놀이기구가 덩그러니 있는 것이 학생들이 없지 싶을 정도로 음산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고 공동 작업 중심의 삶이 이어지다보면 어찌저찌 살게 된다. 없으면 조금 불편하면 되고 불편한 게 곧 익숙해지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것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가난으로 인해 느껴야 하는 신체에 닥쳐오는 고통과 이로 인해 느껴야 하는 소외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섬에 없어도 도시에서 가져다 쓰면 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을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도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배를 타고 대부도에서 출발한 물건들을 받아쓴다. 급한 건 택배도 가능해 빨리만 주문하면 다음날 풍도항에서 받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사진은 카카오맵, 편집은 길잡이)


 구경

풍도에 도착, 선착장에 내리면 섬의 오른쪽 방향으로 제일 먼저 풍도항과 여기를 둘러싼 방파제와 등대가 보인다. 이 항을 따라 나있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초등학교도 나오고 동네에서 유일한 구멍가게와 몇 안되는 식당이나 민박집들이 보이고 그 끝에 청년회관과 파출소가 풍도항 등대를 향한 방파제 사이로 서있다.


 

(사진: 길잡이. 선착장에서 바라본 풍도항의 방파제와 등대)


길이 나있는대로 이곳을 돌아가면 작은 해변이 있고 이 해변에서 낚시를 좀 하는 모양인지 고깃배들이 군데군데 떠있었다. 여기까지는 여느 섬 방파제 인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진짜 이  섬의 풍경을 결정짓는 곳은 풍도항에서 정반대쪽인 북배다. 

북배까지 가려면 중도에 있는, 이제는 버려진 채석장을 지나야 한다.  이 책석장은 1987년에 착공, 1994년에 완공한 경기도 시흥시 시화방조제를 만드는 데 사용한 돌들을 캐던 곳이었다. 사실  시화방조제가 여기서 멀지 않은데 이 공사가 끝나면서 채석장도 버려졌다. 경기도는 이 채석장을 녹색지구화하겠다고 했다는데 몇년이 지나도 이곳은 고철이 되어 녹슬고 있는 채석장비들과 함께 흉물스럽게 버려져 있다. 


(사진: 길잡이. 버려진 채석장의 고철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 채석장의 먼지에 뒤섞이며 황량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 채석장만 지나면 북배가 나오는데, 이 북배는 해가 지는 노을녁이 되면 햇빛과 붉은 바위 색깔이 한데 어울리면서 절경을 만들어낸다. 북배의 바위는 또한 주상절리처럼 병풍의 모습을 내어 조수에 따라 이어졌다 떨어졌다 하는 북배딴목에서 보면 일품이다. 또한 완만한 만을 이루고 있는 북배와 북배딴목 사이에는 물고기의 입질도 적지 않아 손맛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사진: 길잡이. 북배에서 바라본 북배딴목과 등대. 밀물 썰물에 따라 섬이 붙었다 떨어진다)


북배에서 인천쪽을 등지고 섬의 후망산(175m)으로 가면 짧은 산행으로 더 없이 좋으며, 산 정상을 향해 가다 군부대에서 왼쪽으로 이어가면 야생화 군락지가 나오는데, 계절마다 복수초, 노루귀, 변산 바람꽃, 홍아비바람꽃이 번갈아 피며 사람들의 시선을 그렇게 잡는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움 때문일까, MBC는 700여일 동안 이 섬을 촬영해 MBC스페셜로 소개한 적이 있고, 그 외 KBS도 예능프로그램인 1박2일 촬영을 이곳에서 한 적이 있다. 어쨌든 이런 길을 따라 쭉 가면 앞서 말한 은행나무가 있고 그 길따라 마을로 내려와 풍도항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또는 풍도발전소쪽으로 내려와 섬 반대편 쪽을 잠시 보며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 


매의 눈

이렇게 해서 섬 여행을 마감한다. 하지만 후망산을 내려오며 내 머리 위에 가만히 떠있던 매 한  마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풍도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천연기념물인 이 매는 하늘을 배회하다 먹잇감을 찾아 날개짓 하나 없이 공중에 부양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섬에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저 새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 섬에 있었던 일을 세대를 전승해가며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황해의 슬픈 역사를. 

Post a Comment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