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133미터 능선에 있는 이 작은 연못은 잘 알려져 있듯이 석탄 갱도가 무너져 내려 앉아 시간이 지나며 물이 고여 지금의 연못이 되었다. 우리나라 석탄 산업은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에 따라 1960년대부터 활발해져 1970년대 번창하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기울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후반 석탄합리화사업으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석탄은 북한을 제외하고 정선, 태백 일대를 아우루는 강원 지역에 집중 매장되어 있는데 난방용으로 적당한 무연탄이 주를 이루며 이 때문에 에너지 위기가 있었던 70년대에 연탄처럼 난방용으로 집중 생산, 판매되었다. 이 연못이 생성된 것은 이 중 1960년대인 듯하다.
도롱이
연못 이름에 도롱이가 붙은 것 역시 이 지역의 역사를 살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삶과 관련이 있다. 이 연못에 사는 도롱뇽을 보며 일 나간 광부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가족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도롱뇽이 이름에 부각된 것은 이곳에 서식하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도롱뇽이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도 다시 자라기 때문에 부활의 의미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롱뇽의 생사 여부로 자기 남편의 안녕을 바랐다는 말도 있다. 석탄을 캐는 일은 갱도 붕괴뿐만 아니라 가스 누출로 인한 중독, 폭파 사고로도 생명을 잃는 일이 - 그 시절이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 적지 않다. 과거에는 가스 유출을 알기 위하여 갱도에 쥐나 새를 데려 가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을 도롱뇽에 적용했을 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가족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이 연못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등성을 따라난 길을 걷다 보면 자갈을 쌓아 올린 탑이나 당산나무들이 남아 있다. 그렇게 이 일대는 이제는 거의 사라진 석탄산업과 광부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
에너지 위기와 석탄산업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지만 갱도는 석탄을 따라 땅속에 깊고 길다랗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덕분에 갱도 내부가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초짜는 갱도 안에서 심심치 않게 길을 잃기도 했으며 허술한 갱도의 붕괴는 인명사고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못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이 주도한 석탄산업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산업 구조의 탓이 크다. 정부는 좋은 탄맥을 가진 대한석탄공사(당시에 “석공”이라고 불렀다)를 중심으로 그 아래 동원탄좌, 삼척탄좌, 대성탄좌 같은 민영탄좌(채탄기업을 탄좌라 불렀다)들이 석탄을 채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들은 다시 가장 말단에 개인사업자가 사람을 모아 탄을 캐도록 했다. 여러 단계로 나눠진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였으며, 덕분에 갱도는 미로처럼 여기저기 파헤쳐졌고 사고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런 구조는 가장 윗 단계가 탄이 많이 나오는 곳을, 가장 아랫 단계는 탄이 거의 나오지 않는 곳을 가져가는 식이었기 때문에 채탄량의 차이만큼 설비, 시설, 노동 강도, 목숨을 거는 위험도 비례했다. 이는 광부 노동자들 사이에 지금의 대기업 정규직과 하청기업 비정규직의 차이만큼 큰 차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당시 군사독재정권이 에너지 위기와 이에 동반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폭압적인 조치들을 취함에 따라 노동자 일반의 삶도 혹독했지만 특별히 광부 노동자들 일반은 에너지 위기에 따른 대량생산 저탄가 정책으로 인해 더욱 고통받았다.
사북항쟁
그중에 이 도롱이 연못이 있던 이곳 사북은 동원탄좌가 있던 자리였다. 동원탄좌는 1980년 4월의 사북항쟁으로 유명한 회사다. 이 회사는 다른 민영탄좌와 마찬가지로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 허술한 안전, 어용노조를 통한 억압적 노무 관리로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이는 모두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적 경제, 노동정책과 궤를 같이 했는데, 박정희가 죽자 그동안 억눌린 노동자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졌는데, 그것이 사북항쟁이다. 문제는 이 항쟁은 사북을 포함한 태백, 도계 등 지역 일대 광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확산될 수 있었으며 당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투쟁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정권을 약탈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 광주항쟁 이전에 - 군대를 통한 무력 진압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이때 항쟁은 흔적들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넓다란 사북역 안 선로들과 공터는 동원탄좌의 석탄들이 쌓여 있었던 곳이며 항쟁 당시 광부들이 점령한 곳이기도 하다. 또 이 석탄들을 실은 화물열차가 지나는 사북역 옆 터널 밑의 안경다리는 당시 사북광업소를 점거하여 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다리 밑에서 올라오는 진압 경찰들에게 투석을 하며 저항한 곳이었다. 이 안경다리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사북탄좌문화체험관이 있다. 당시 동원탄좌가 있던 곳의 일부를 남겨 놓아 그 시절로 잠깐이지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강원랜드
그러나 지금 사북은 국내 겨울 스포츠와 도박으로 유명한 곳이다. 70년대 에너지 위기에 동반한 경제 위기를 지나며 석유 가격의 하락, 도시가스의 보급 등 연탄 생산이 주를 이룬 석탄 산업은 사향길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1988년부터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실시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 지역 일대 주민의 반정부 투쟁이 벌어졌다. 그 후 지역 경제 활성화 정책으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자금 51%가 들어간 공기업이지만, 주식시장에 상장된 강원랜드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강원랜드는 이 지역 일대에 17개 카지노, 관광호텔, 콘도미니엄, 스키장, 골프장 등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시설들이 모두 과거 동원탄좌의 사북광업소의 갱도들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억의 샘
3, 40년전만 해도 거미줄처럼 땅속에 얽혀있던 갱도 위로 풀과 나무는 자라기 쉽지 않아 민둥산이 여기저기 있었다. 게다가 캐낸 석탄은 산 군데군데 모여 있으며 또는 볼상 사납게 난 지그재그 철로를 따라 사북역 저탄장까지 옮겨 가며 검은 먼지를 날렸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석탄을 씻겨낸 물이 개울을 이루며 산 아래로 검게 흘렀다. 덕분에 그 시절 이곳은 검은 산과 검은 먼지를 뒤집어쓴 건물들이 뒤섞여 있었으며 사람들은 검은 공기를 마시며 목숨을 걸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이제 역사처럼 되어, 도롱이연못만이 그 역사의 기억처럼 산정상에 이르는 길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한과 눈물의 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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