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주익 성. 근대에 들어 이 성은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공격,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바스티유' 였던 것이다. 사진 김승현 |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항구 쪽을 바라보면 언덕 하나가 솟아 있다. 몬주익 언덕이다. 그리고 그 위에 성 하나가 서있다. 지형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성을 보면, 이 곳이 지중해를 바라보는,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라는 걸 금새 알 수 있다.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적에게서 도시를 지키는 데 이만큼 좋은 자리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몬주익 성이 오늘날처럼 성이나 요새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1640년 카탈루냐 반란이었다. 그 전까지는 망루 하나가 전부였다. 이 망루가 언제부터 어떤 모양으로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새나 성이 아니라 전망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몬주익 성이 오늘날처럼 성이나 요새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1640년 카탈루냐 반란이었다. 그 전까지는 망루 하나가 전부였다. 이 망루가 언제부터 어떤 모양으로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새나 성이 아니라 전망대였던 것이다.
오늘날처럼 성의 모양을 띠기 시작한 것은 1640년 반란 이후였다. 이 때부터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요새로서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었다. 1640년 반란은 카탈루냐 사람들이 카스티유 지배자들이 강요한 부담에 저항한 것이었다. 무려 12년을 끈 전쟁 동안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도 참여하고 있던 동맹의 다른 주요 일부였던 카스티유 지배자들이 바다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요새를 쌓아 갔다. 18세기에도 유럽의 다른 지배 동맹들 사이에 벌어진 많은 전쟁, 예컨대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몬주익 성은 그 일부였다. 이 전쟁들은 기본적으로 지배자들간에 벌어진 탐욕의 전쟁에 불과했다.
1842년 에스파르테로의 바르셀로나 폭격. (사진 바르셀로나닷컴 이미지 캡쳐) |
19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이 성의 기능은 바뀌기 시작했다.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1842년에는 온건한 자유주의자이자 귀족이었던 에스파르테로가 대중 봉기한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과 소수의 자본가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이 성에서 시내로 폭격을 해대어 시 대부분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 1843년에도 최고임시의회가 부의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대중들에게 이 성에서 폭격을 했다. 335명이 죽었다. 1856년에도 군 쿠데타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이 성에서 폭격을 했다. 400명이 넘게 죽거나 다쳤다. 이러한 저항은 스페인의 국민 국가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귀족, 교회의 반동을 한 편에 두고 다른 편에 저항하는 신흥 중간 계급(오늘날의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들을 둔 양측의 충돌이었다. 물론 저항 세력 내에서 중간 계급은 늘 노동자들의 바람과 달리 온건했고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배자들의 악랄한 진압을 불러오곤 했다.
1897년 몬주익 성에서 아나키스트 처형 장면 그림. (사진 바르셀로나컬쳐 이미지 캡쳐) |
이를 각성하고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한 노동자들 주로 무정부주의자, 혁명가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의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투쟁을 벌였다. 지배자들은 이들을 탄압, 체포해 몬주익 성에 가두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1896년에 700명 정도를 한꺼번에 투옥하고 고문해, 네 명을 성의 해자에서 총살한 일이었다. 이 사건은 스페인 정부가 국제적인 비난과 압력을 받아 1901년에 죄수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명 높은 사건이었다.
1909년 모로코 파병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도 이 성은 감옥이었다. 파업이 봉기로 확대하면서 2천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다섯 명이 해자에서 총살당했다. 1919년에는 발전소에서 노동자 여덟 명을 해고한 것에 맞서 일어난 저항이 총파업으로 확대됨에 따라 파업에 참가한 3천여 명이 투옥되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저항하는 노동자들, 혁명가들의 감옥이 되었던 몬주익 성은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몬주익 성은 프랑스의 ‘바스티유’였다. 그리고 1936년 혁명의 발발과 함께, 반파시스트 민병대가 8월 23일 이 성을 접수했다. 혁명가들은 성 안 가운데 퍼레이드 광장을 ‘자유의 광장’이라 이름 붙이고 카탈루냐 깃발을 올렸다. 또한 이 성에서 민병대를 모았고, 파시스트 공중 공격을 대비해 대공 기지로 사용했다. 거의 효과가 없기는 했지만.
그러나 프랑코 파시스트 일당과의 내전은 만만치 않았고, 이에 맞선 인민전선 정부는 자본가들과 협력하며 혁명의 전진보다, 혁명의 초기 성과물에 지나지 않았던 공화국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방어적인 내전이 지속되면서 동시에 혁명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혁명 내 보수적 부위들, 자본가들, 공산당원들이 급진 세력을 파랑헤 당 지지, 간첩, 반란 등등의 혐의로 이 성에 가두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요 죄명은 간단히 말해 공화국을 배신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1937년 5월 사태 이후 이런 일들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사건이 1938년 8월 11일 이 성에서 일어났다. 하루만에 62명을 처형했던 것이다. 내전 기간 동안 이 성에는 1,500명이 투옥되어 있었고, 그 중 250명이 처형되었다.
1939년 몬주익 감옥. 이 곳에 갇힌 사람은 혁명 패배 전에는 인민 정부에 의해 파시스트들의 협력자, 공화국의 배신자라는 혐의로, 혁명 패배 후에는 파시스트에 의해 반란자라는 혐의로, 구금 고문 죽임을 당했다. (사진 이베리아네이쳐 이미지 캡쳐) |
혁명을 진압하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이 성을 군형무소로 사용했다. 혁명 전쟁에서 패한 노동자들, 혁명가들이 이 곳으로 잡혀와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파시스트들의 잔인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 프랑스 혁명의 한 자코뱅 혁명가가 말했듯, 혁명을 절반만 하는 사람은 스스로 무덤을 판 것과 같다는 격언을 실감하게 되기도 한다.
몬주익 성 해자. '산타에우랄리아 해자' 라고 불린다. 지금은 잔디와 꽃이 보기 좋게 수놓아져 있지만, 이 해자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총살 당했다. (사진 김승현) |
아마도 이 곳의 죽음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두 사람은 루이스 콤파니스와 안토니오 에스코바일 것이다. 루이스 콤파니스는 1934년 카탈루냐 자치 정부를 세우는 데 주도적이었으며 내전 발발과 함께 무기를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안토니오 에스코바는 혁명에 헌신한 시민방위군 19사단장으로 프랑코에 맞선 저항을 호소했다. 하지만 혁명 패배 후, 안토니오 에스코바는 1939년 7월에 잡혀 40년 2월 8일 새벽에 해자에서 처형되었고, 루이스 콤파니스는 파리에 있다 나치에게 잡힌 뒤 프랑코에게 건네져 1940년 10월 15일에 같은 해자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죽기 전 “카탈루냐여” 하고 외쳤다.
몬주익 성은 프랑코의 지배 수단으로 계속 있다, 1963년 군사박물관으로 개장했다. 그리고 프랑코가 죽고 한 참 뒤인 2007년에야 바르셀로나 시 정부에게로 완전히 이양돼, 군사박물관도 함께 문을 닫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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