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일정을 재촉하는, 안토니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신성 가족)교회. 가우디의 대표적인 건축으로 현재도 '공사 중'이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 김승현.(주소 08025 바르셀로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하면 가장 먼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i Cornet,1852.6.25– 1926.6.10) 떠올리곤 한다. 여행사도 바르셀로나 여행 일정으로 가우디 건축물 방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다. 가우디 덕분에 일정이 빠듯해진다.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인 가우디는 인생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는 그의 걸작 건축물 여기에 남아 있다. 가우디는 구리 세공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다섯 형제 막내로 자랐고, 17세기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 카탈루냐로 이주한 행상인 집안의 자손이다.
1904년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건축 모습. 사진 몬주익 성 전시관. 촬영 김승현
가우디는 당시 스페인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어려서부터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하지만 남보다 더 깊이 심취했는지, 종교적 단식을 곧잘 해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나중에 공상적 사회주의로 이끌렸는데 그를 따르는 학생들과 카탈루냐의 포블레 수도원 재건을 계획했을 정도였다. 수도원은 12세기 수사들의 공동체를 위한 성당이었는데 1835 국유화 이후 방화로 무너진 방치되고 있었.(20세기 중반에 재건되었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루크의 예술가 협회나 성녀 몬트세라의 영적 동맹에도 가입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의 종교적, 정치적 활동은 주로 자신이 생각한 카탈루냐 인들의 문화적 정체성과도 관련 있었다.

다른 한편, 가우디는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고 특히 류마티즘 때문에 의사의 권고로 일찍부터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여기에 종교적 단식은 그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런 허약 체질 때문에 가우디는 병가로 점철된  생활을 했지만 덕분에 3 카를로스 전쟁에 가고 대신 건축 공부를   있었다. 3 카를로스 전쟁은 카를로스 왕가의 복귀를 요구하는 카를로스 왕당파가 스페인 중앙 정부에 맞서 19세기 거의 내내 차례나 벌인 전쟁이다. 이들은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 정통주의를 옹호하며 공화주의, 자유주의에 반대했는데 스페인 내전(1936-39)에서는 가톨릭과 함께 프랑코의 편에 섰. 여하튼 건축에서 자질을 보인 가우디는 1878 파리 세계박람회에 참가했다.  평생의 친구이자 카탈루냐 출신의 산업 자본가 에우세비 구엘과 인연이 되어 나중에 그의 지원으로 다수 건축을 있게 되었다

가우디의 건축 세계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건축, 자연, 종교(로마 가톨릭) 중심이 되어, 세라믹, 스테인드글라스, 연철 단조, 목공을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버려진 세라믹 조각을 사용한 트렌카디스는 그의 독창적인 기법이다. 동시에 가우디는 신고딕주의와 동양 기술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20세기 초의 모더니스타 운동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런 특징들은 아무리 예술이나 건축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작품들을 한 번 보면,  금새 !” 하고 감탄하며 알 수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내부. 스테인드글라스에 자연 빛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교회 안이 여러 빛으로 빛난다. 이렇게 가우디의 작품들을 보면 예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새 !” 하고 감탄한다. 사진 김승현.
가우디가 1883년에 건축 책임을 맡은 바르셀로나 성당, 오늘날 사그라다 파밀리아(신성 가족) 교회로 알려진 건축물은 위와 같은 그의 건축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초기 디자인을 완전히 변경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꾸어 현재와 같이 만들었다. 예컨대 바르셀로나의 강렬한 햇빛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교회 내부로 들어와 다양한 빛깔을 내도록 것은 그가 평소 지중해, 카탈로니아의 문화를 중요시했던 것과 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연주의와 가톨릭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일단 교회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편안함,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덕분에, 내전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는 민중들의 가톨릭에 대한 분노로 대부분 교회가 불타거나 약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만큼은 살아남았. 사람들은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가만 놔두었다고 한다. (조지 오웰은 이를 보고 투덜댔다. 그는 이 교회 역시 무너뜨려야 했다고 생각했는데 미의 세계보다 억압적인 착취 세력이었던 스페인 가톨릭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0년대 바르셀로나 몬주익 산 주변의 빈민촌의 모습이다. 일을 찾아 카탈루냐 주 내외에서 온 사람들이 지낼 곳을 만들기 시작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다. 1914년에는 이 일대에 위와 유사한 집이 5천 채는 있었다고 하는데, 산업 발전에 동반한 도시 팽창의 한 모습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집들도 여기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같은 판자집과 동시대의 집들이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게 가난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이었고, 동시에 왕정-가톨릭이 중심이 된 정치 체제와 경제적으로는 산업 자본주의가 성장하며 발생한 모순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자유주의 공화주의자가 있었지만 모순을 해결하기에는 무능력했고, 여전히 대다수는 왕정과 가톨릭에 대한 분노와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도 함께 갖고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1930년대 혁명기에 분노한 투사가 되어, 교회를 부수거나 태우고 공공시설들을 장악, 집산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살아 남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몬주익 성 내 전시관 자료를 촬영한 것이다. (사진 김승현)

그의 자연주의 영감이 남긴 건축은 이 외에도 카사 칼베트가 유명한데 건축으로  최고 건축상을 시에서 받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카사 바트요, 카사 밀로 역시 유명한 구엘 공원과 함께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카사 칼베트(칼베트 네 집이라는 뜻). 사진 구글맵 캡쳐. 이 건물은 1899년 가우디가 바르셀로나의 성공한 섬유업자 페레 칼베트의 의뢰로 지었다. 집주인은 건물의 지하와 1층을 사무실로 썼고, 그 위층은 생활 공간으로 썼다. (주소 Carrer de Casp, 48, 08010 Barcelona, 스페인)

카사 밀라(밀라네 집). 페레 밀라와 로제 시그먼의 결혼을 위해 있던 집을 완전히 새로 지은 집이다. 밀라가 가우디에게 의뢰해 1906년부터 1910년의 공사끝에 완성했다. 페레 밀라는 돈과 부를 사랑한다는 악평이 자자했고, 그의 신부는 남미 출신 스페인 사업가의 미망인이었다. 이 때문에 밀라는 사랑이 아니라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사진 김승현.(주소 Provença, 261-265, 08008 Barcelona, 스페인)
카사 바트요(바트요 네 집). 섬유 사업가 조셉 바트요가 1900년에 구입한 집을 가우디가 의뢰를 받아 1904-1906년 사이에 재건축한 건물이다. 바트요 집안은 시내 섬유 공장을 여럿 가진 자본가 집안이었는데 조셉은 집안의 다른 어떤 집보다 독특하게 지어달라는 주문을 했다. 사진 김승현. (주소 Passeig de Gràcia, 43, 08007 Barcelona, 스페인)

여기서는 구엘 공원을 들여다 보자. 공원이 있는 그라치아(Gracia)는 나중에 바르셀로나 시에 통합된 작은 마을로 자락에 위치한, 바위가 대부분이고 풀과 나무는 얼마 자라지 않던 곳이었다. 바르셀로나는 19세기 중반 이후 산업 발전으로 점차 커지고 있던 중이었고, 이에 동반해 외곽에 공장이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붐비게 되었다. 그라치아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산업 발전과 함께 등장한, 바르셀로나의 부자들이 살던 북부의 사람들은 동네 주변의 그라치아 탁한 공기와 불결한 노동자들을 불편해 했다.  (시는 도시 팽창으로 인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20세기 들어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 구엘이 등장한다.

구엘은 19세기 중반 바르셀로나의 산업 성장에서, 특히 섬유업(당시 바르셀로나의 주 산업이었다)에서 막대한 부를 끌어들인 산업 자본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의 쿠바 점령을 따라 나서 거기서 부를 쌓은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집안의 딸이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구엘은 쉽게 하지만  많은 부를 축적할 있었다. 구엘은 나중에 자신이 가진 부로 스페인 왕가를 지지했고 1908년에는 백작이 되었다구엘은 가우디와 마찬가지로 공상적 사회주의를 공유했는데, 여기에 기반해 그는 섬유 공장을 현재의 콜로니아 구엘(Colonia Güell) 옮기고 노동자들의 도시 공동체를 짓고자 했다.(노동자를 위해서라기 보다 산업적 효율성이라는 인상이 더 강하다) 중간에 재정난으로 포기해야 했지만 그 전까지  프로젝트는 가우디가 맡았다. 

문제의 그라치아는 구엘이 1900년에 사들인 곳이었다. 인근 부촌의 원성을 사던 이곳을 산 구엘의 목적은 투자였던 듯한데, 나중에 가우디에게 부자들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물론 가우디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 곳에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재정난으로 완성하지 못했고 공원 일부와 채만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23년에 구엘은 이 곳을 자신의 이름을 딴 공원으로 만들어 시에게 주었.
가우디가 설계한, 지금의 구엘 공원. 구엘이 사들인 그라치아 일대에 만들어진 이 곳은 원래 부자들의 마을로 만들기 위한 구엘의 투자였지만, 자금 부족으로 중단하고 나중에 공원이 되어 바르셀로나 시 소유가 되었다. 산자락이어서 주변 보다 높은 이 곳은 바르셀로나 해변과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사진의 초점 위로 파랗게 보이는 곳이 지중해와 그 위 구름이다. 사진 김승현.(주소 08024 바르셀로나 스페인)

위 건물들의 주인들을 보면, 이들이 섬유산업에서 성공한 자본가들인 것이 눈에 띤다.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카탈루냐 일대가 19세기 중반 이후 섬유 산업이 발달했던 것과 연관 있다. 스페인 전체에서도 섬유 산업의 발전은 이 곳이 가장 독보적이었다. 또한, 위 건물들을 포함해 당시 성공한 사업가들의 주택이 있는 위치를 보아도 대게 그라치아 거리 일대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 20세기 초까지 카탈루냐 광장 북쪽으로는 자본가들, 돈 있는 사람이 사는 부촌이었다. 이쯤되면 구엘이 그라치아 거리 끝의 산자락을 사서 거기에 동네 하나를 만들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광장 남서쪽은 노동자, 빈민 지구였다. (람블라스 거리를 두고 고딕지구에 해당하는 동쪽은 시청과 교회 같은 공공 시설들이 있다). 람블라스 거리  서쪽 중간쯤에 재래시장, 보케리아가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도 좋다.  사진. 구글맵 캡처
가우디는 건축과 신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 혼자 살며 삶의 대부분을 일에 집중했다. 그 일에 대해 자신이 남긴 기록이 없어 우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대신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건물을 그는 남겼고, 그 건물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살았던 19-20세기 전환기의 카탈루냐 산업 발전에서 그가 찾고 싶었던 '자연과 신'이 아니었을까. 이는 그가 사용한 재료들과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말해준다. 물론 그 자연과 신은, 확실히 산업 발전의 또 다른 산물, 빈곤과 빈곤한 사람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들이자 오히려 분노의 대상이었고, 가우디가 이 빈곤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연민을 보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 

일에 집중했던 가우디는 구엘 덕분에 1906년부터 1925년까지 구엘 공원에서 살며 위에서 소개한 건물들을 만들었고(이 건물은 지금 구엘박물관이 되었다) 이후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작업실에서 살며,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다. 초라한 행색으로 길을 지나다 택시에 치여 뺑소니를 당했고, 여러 차례 사람들과 심지어 병원에서 조차도 무시되다, 마침내 신원이 밝혀진 이후에는 이제 퇴원을 거부한 채로 입원해 있다 숨졌다.

가우디는 때로는 건방지고, 때로는 고집 센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건축물 역시 21세기 바르셀로나에서 여전히 빼어남을 자랑하고 있는 듯 서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해주고 싶다. 유럽까지 힘들게, 멀리 간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거나 꼭 봐야 할 게 안에 있지 않다면, 굳이 돈까지 써가며 가우디가 만들었다는 건물들 안까지 다 들어갈 필요는 없다.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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