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는 반(反)파시스트 민중올림픽 개최 예정 도시였다

Robert Capa의 유명한 사진. 국제여단으로 참여한 지원병의 모습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인이라면 황영조의 마라톤으로 기억하는 그 올림픽이다. 황영조는 바르셀로나 해변을 바라보는 몬주익 언덕 바로 아래까지 숨이 차는 것을 참고 올라와 올림픽스타디움, 에스타디 올림픽 류이스 콤파니스(Estadi Olímpic Lluís Companys)로 들어왔다. 스타디움 앞에는 황영조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러나 이 곳에는 그보다 더 깊은 역사가 있다. 


에스타디오 데 몬주익. 몬주익 성에서 카탈루냐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보인다. 사진 wikipedia
이 스타디움의 원래 이름인 에스타디오 데 몬주익(Estadio de Montjuic)은 몬주익 언덕 위에 경기장이라는 뜻이다. 1929년 국제박람회에 맞춰 1927년에 세운 건물로 1936년 열릴 하계올림픽 개최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1936년 올림픽은 베를린에서 열리게 되었다. 한국인은 일제 치하의 조선인 마라토너 손기정을 떠올리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올림픽은 파시스트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것이고 올림픽은 철저하게 나치의 선전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반대와 보이콧 운동에도 불구하고 기업과 정치인들로 구성된 비민주적이고 반동적이기까지 했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베를린 개최를 고집했다. 

당시 파시즘이라는 반동은 제국주의 전쟁, 경제 위기와 이에 맞선 혁명의  양극화에서 벌어지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주요하게는, 2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국가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이 정권을 장악했다. 전후 1919년, 20년의 “붉은 2년”으로 불리는 혁명 운동이 저지당한 후였다. 독일 역시  독일 혁명 이후 줄곧 우경화하다, 히틀러가 중심이 된 나치 당이 1930년대 경제 위기와 함께 정권을 잡았다. 프랑스에서도 경제 위기의 영향으로 실업자가 늘어나고 파시스트 극우 정치인들이 이들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 심지어 준 군사조직을 결성해 무력 시위를 할 정도였다. 
1936년 7월 22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바르셀로나 민중올림픽 포스터

이런 맥락에서 보면 베를린 올림픽 개최 결정이 어느 정도 반동적이었는지를 금새 알 수 있다. 보이콧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한 바르셀로나가 베를린 올림픽에 반대하는 민중올림픽(Olimpíada Popular)을 개최하기로 했다.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올림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민중올림픽을 위해 에스타디오데몬주익이 그 경기장이 되기로 했다. 

민중올림픽은 1936년 7월 22일부터 26일까지 오늘날의 경기뿐만 아니라, 체스, 민속춤과 음악, 연극 등도 함께 경연하기로 했다. 스물두 나라에서 6천여 명이 등록했다. 주로 파시스트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들과 좌파 정당의 스포츠클럽, 노동조합원들이었다. 하지만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던 민중올림픽은 안타깝게도 스페인 내전의 발발(36년 7월 17일)로 개최되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세계 곳곳에서 온, 적지 않은 선수들이 인민전선으로 수립한 공화국 정부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내전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무기가 처음 배포되기 시작한 7월 19일, 이들은 노동자민병대에 참가하거나, 8월 12일 이후 부터 도착한 국제여단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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