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dor de Colón. 높이 60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기둥이 지중해 너머 아메리카를 향하고 있다. 사진 김승현 |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따라 몬주익 쪽을 향해 선착장과 보도를 걷다보면 저끝에 높다란 기둥 하나가 서 있고, 그 위에 사람의 모습을 한 동상이 서 있다. 콜럼버스 기념탑이다. 이 기념탑은 바르셀로나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인 카탈루냐 광장에서 람블라 거리를 따라 지중해쪽으로 걸어오더라도 만나게 된다.
바르셀로나의 고지대인 몬주익 성이 있는 곳에서 항구를 따라 내려와도 이곳을 경유하게 되고, 또 콜럼버스가 서 있는 동상에서 거대한 선착장 길을 따라가더라도 상대적으로 최근 건물인 바르세로나 세계무역센터 건물도 있으니, 이곳이 바르셀로나 지중해 무역의 한 가운데 있음을 금새 알 수 있다. 그의 옆에는 바르셀로나 해양박물관이 있다.
높이 60미터의 이 거대 기둥과 동상은 아메리카 대륙을 향한 그의 첫 여정을 기념하기 위해 1888년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에 맞춰 만들어졌다. 기둥의 꼭대기에는 엄청난 키의 콜럼버스가 서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지중해 너머 “신세계”를 가리키고 있다. 기둥 아래에는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페르디난드 2세와 이사벨라 1세도 있다.
조각들은 스페인 역사가 막 강력해지기 시작한 시기를 드러낸다. 주로 이사벨라 1세와 페르디난드 2세가 콜럼버스를 만나는 것과 그것이 세계 정복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라는 인물을 우리가 스페인의 일상에서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압도적인 위치에서 저 멀리 내다보는 선지자.
콜럼버스. 탐욕적인 모험가 해상 상인이 가톨릭의 위선을 쓰고, 지배자와 손을 잡고 만들어 낸 결과는 끔찍했지만 여전히 스페인 국가의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사진.김승현 |
1492년 1월 2일, 스페인의 무슬림을 잔혹한 방식으로 축출하면서 마침내 레콩키스타에 성공한 두 주인공 이사벨라(카스티야)와 페르디난드 2세(아라곤)는 정략적인 결혼으로 두 봉건국을 통합하고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들은 레콩키스타(재정복)에 멈추지 않고, 아시아와의 무역을 보다 활발히하고 유럽의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책략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탐욕적인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고용했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첫 출항을 했다.
중세 가톨릭의 협소하지만, 탐욕의 세계관이 왕, 귀족 세력과 해양 상인 세력을 만남으로써 파괴적인 한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던 미개인이 사는 “인도”는 오늘날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곳이었고, 그들이 발견하고 싶었던 “에덴 동산”은 신앙과는 아무 상관 없는 향신료와 금이 쏟아지는 낙원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침략자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지배자의 본성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더 깊이 더 멀리 들어갔다. 그 흔적은 깊숙이, 오랫동안 남아 원주민들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19세기까지 독립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런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국 민족의 과거에 자긍심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와 관련이 깊다. 그의 동상 건설은 자본주의 성장과 함께 민족 국가가 스페인에서 확립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이 같은 방식으로 기념되기 시작하던 때는 사실 영국, 프랑스가 이미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나의 국민국가로서 발전을 마친 상태였고, 독일은 그 과정을 엄청난 속도로 따라 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스페인은 16세기 강국을 형성했던 그 힘이 오히려 그 발전을 발목 잡는 역할을 했으며, 그 덕분에 지역적 패권이 구 가톨릭과 함께 강력했던 탓에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뒤늦었다. 19세기 내내 스페인은 공화주의와 왕당파의 대립으로 갈등을 반복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바르셀로나가 중심이 된 카탈루냐는 지중해 무역에서 발전해 전체 스페인에 비해 지역 자본가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공업 발전의 속도도 빨랐다. 이것은 카탈루냐가 다른 스페인에 비해 독립적일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 즉 세계에 산업적 영향력, 국민국가의 힘의 과시로 활용된 세계박람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88년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여기에 콜럼버스는 새로운 민족국가의 부흥을 위한 괜찮은 상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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