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돔 Vendôme 광장 (사진: 영어판위키페디아) |
지금 가면 명품 상점과 유명 호텔이 즐비한 곳, 방돔 광장. 관광객들도 다 같은 관광객이 아니므로, 베낭 여행, 도보 여행 등을 다니는 가난한 여행자에겐 그림의 떡 같은 곳이다. 그래서 굳이 올 필요도 없지만, 그럼에도 고풍스런 건물들과, 무엇보다 그 한 가운데 있는 탑은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이면서도 또 압도적이어서 꼭 찾아오게 만들고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리코뮌 전까지 이 곳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이 있고 난 직후는 조금 달랐지만, 그 사이 사태는 많이 변했다. 황제가 두 명 있었고, 사라졌던 왕들이 다시 나타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곳에 오려면, 경찰의 심문을 통과해야 했고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이런 방돔 광장(place Vendôme)은 루이 14세가 방동 지역과 그 지역의 공작을 기려, 지금의 이 곳에 만든 것이다. 이 팔각형 모양의 광장은 샤또 드 베르사이유 궁의 건축가로 유명한 쥘 아르두앙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가 설계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광장 중앙에 자신의 기마상을 실제 사이즈보다 더 크게 만들어 세웠다. 당연히 이 동상은 프랑스 혁명 때 성난 파리 사람들이 파괴해버렸다.
1804년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났다. 그는 왕정 대신 제정을 세우며,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데 기념비적인 전투였던 오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거대한 탑을 세우게 했다. 탑에 들어간 동은 이 전투에서 포획한 133대의 대포를 녹인 것이었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자신의 동상을 올렸다. 180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 1810년에 완성했다.
얼마 뒤 부르봉 왕조가 등장했다. 전과 같은 절대 왕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부르봉 왕가의 명예를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방동 광장 한 가운데 있는 나폴레옹 동상을 내려버리고 대신에 부르봉 왕가를 연 앙리 4세를 그 위에 세웠다.
필립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 자리를 팽개치고 대신 황제가 되겠다고 해 제정을 세웠다. 1852년의 일이다. 자기 삼촌을 닮고 싶어 나폴레옹 3세라고 호칭도 바꾼 그는 마치 이전의 왕들이 그랬듯 아시아, 아메리카 할 것 없이 열심히 제국주의 전쟁을 치르고 다녔다. 방돔의 탑 위에 있던 앙리 4세도 내려버리고 대신에 다시 자기 삼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세웠다. 그리고 1870년 그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포로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없는 프랑스의 지배자들은 프러시아와의 강화와 국내 질서를 잡는 데 급해졌다. 그들은, 파리를 고립시키고 공격하는 프러시아에 항복했지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파리 사람들은 항복을 거부하며 베르사유로 도망친 프랑스 제3공화정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 파리코뮌을 세웠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뜨의 소동이 있고 난 뒤인 3월 19일, 파리 사람들은 시청을 점거하고, 국민방위군은 중앙위원회를 결정해 파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인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파리에는 아직 보나파르트 세력들을 포함한 우익과 자본가들, 중간 계급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상점과 공장을 닫아버리고 의도적으로 파리의 일상을 방해했다. 동시에 이들은 소수지만 파리의 여론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3월 21일, 아니나 다를까 우익들이 오페하(Opera) 등 파리 중심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그동안 파리 코뮌의 혁명가들을 좀도둑, 폭도 등으로 몰아부치던 자들과 한통속이었고, 그 시위의 중심에는 투철한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었던 “Society of the Friends of Order”(보나파르트의 질서당의 당원과 지지자들의 모임)가 있었다. 이들의 시위는 파리의 우익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시위가 조금씩 펠레루아얄 주변과 그 상가 일대로 확대되었다.
3월 22일, 이에 맞선 좌익들의 집회가 방돔 광장에서 열렸다. 이전까지 이 광장은 부자들, 권력가들이 드나드는 곳이지, 평범한 파리 사람들이 오는 곳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곳은 전 날 우익들의 집회 장소와 멀지 않았고 무엇보다 국민방위군의 본부가 있는 곳이었다. 이 집회는 충분히 우익들을 자극했고 미친듯이 달려드는 우익들의 총격에 열두 명이 죽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그러나 우익들의 준동은 저지당했다.
하지만 파리 바깥, 베르사유는 점점 파리를 옥죄왔다. 그리고 그 분노는 파리에 남아 있는 지배자들과 그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로 옮아갔다. 베르사유 정부를 이끌고 있는 테에르에 대한 분노는 그가 살았던 집으로 옮겨져 집을 다 허물어버렸다. 그런 분노는 이제 방돔 광장의 탑으로 옮아갔다.
당시 미술가동맹의 대표를 맡고 있던 귀스타브 쿠르베는 파리코뮌에 적극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광장 한 가운데 있는 나폴레옹 동상을 극도로 싫어했다. 나폴레옹과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실제로 1860년에 이미 이 탑을 철거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프러시아와의 전쟁 이후 다시 같은 주장을 제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12일, 피야(Pyat)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투표가 이뤄졌고 해체가 결정되었다. 해체는 5월 16일 오후 두 시에 하기로 했다.
탑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역사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파리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파리 시내 구경을 한 번도 못해봤을 그런 사람들이었다. 끈으로 묶고 사람들이 당기기 시작했다. 꿈쩍도 않자, 더 강한 끈으로 바꾸고 다시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시간, 오후 5:45. 탑 꼭대기에 있는 동상이 삐끄덕 대는 소리를 내며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으로 떨어지면서 두동강 났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무너진 나폴레옹을 짓밟고 탑 조각들을 기념품으로 챙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들이 일어나자,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파리코뮌의 전사들의 기념 사진의 상당 부분은 이 때 이 곳에서 찍은 것이다.
* 참고:
Massacre: The Life and death of the Paris Commune of 1871 by John Merriman. Yale University Press 2014.
The Paris Commne: A Revolution in Democracy By Donny Gluckstein. Haymarket Book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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