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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라세스 입구 (사진 김승현) |
페르라세스(Père Lachaise)는 공동묘지다. 프랑스혁명 이후 1804년 5월에 만들어진 곳으로 이 공사 얼마 후 유명한 몽마르뜨 공동묘지를 포함한 다른 공동묘지들도 만들어졌다. 비싼 장례 비용 문제와 도시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공동묘지이기는 하지만, 피에르 부르디에, 프레데릭 쇼팽, 유진 들라크루아, 짐 모리슨, 로씨니, 오스카 와일드 등 유명인들이 묻혀있어 이들을 추모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공동묘지는 정치적으로 프랑스 좌파들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 넓은 묘역의 정문으로 들어가 오른쪽 끝으로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Mur des Fédérés”(뮈르데페데레스)가 나온다.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이라는 뜻인데,페데레스는 프랑스 혁명 당시 자발적으로 무장에 참여한 사람들을 뜻했다가 파리코뮌이후 코뮌전사들을 부르는 말로 자리잡혔다.그리고 이 벽에 “1871년 5월 21-28일 코뮌 사망자를 위하여” 라고 쓰인 대리석현판이 붙어있다. 이 벽이 파리코뮌과 어떤 관계일까.
이 벽은 1871년 당시에도 이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베르사유의 제3공화정 군대가 파리코뮌을 진압하기 시작한 1871년 5월 21부터 28일까지의 “피의 한 주” 중, 베르사유의 군대에 투항하지 않고 마지막 날인 5월 28일까지 전투를 벌였던 참호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투 동안 코뮌의 많은 투사들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투사들은 이 벽에 한 줄로 세워진 채 총살당했다.
1871년, 마르크스는 자신이 쓴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코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생생한 사례”라고 했고, 엥겔스는 “프롤레타의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하고 말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소수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엘리트들의 지배체제를 사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생산자들의 직접 통치를 통해 계급을 철폐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 꾸며낸 말이 아니라 사실 파리가 노동자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프랑스의 지배자들이 무시했던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천했다.
코뮌의 대의원은 각 구에서 보통 선거로 선출되어 소환, 해임될 수 있었다. 코뮌의 집행위원회만 90명 중 20명이나 노동자였다. 이들은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았으며 최고 임금 상한 제도에 묶였다. 노동자들은 야간 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으며, 생산을 계획하며 공장을 직접 운영했다. 무상 교육과 보육이 이뤄졌다.
베르사유의 지배자들이 파리를 폭도, 도둑, 파괴자들이라고 음해했던 것과 달리, 코뮌 안에서는 - 베르사유 군대에 의한 파리 포위와 파리 내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 부족한 자원을 분배하며 공동체를 운영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 사라지고, 다른 어떤 때보다 거리는 안전했다. 코뮌의 국제주의로 독일 출신 노동자가 노동부 장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코뮌은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리옹, 나르본, 보르도, 마르세유에도 코뮌이 들어섰다.
연이은 전쟁과 프러시와의 전쟁에 심각하게 패한 제3공화정의 위기 의식은 갈수록 높아갔다. 베르사유는 방금까지 전쟁을 치렀던 프러시아와 긴밀히 협조했다. 전쟁 동안의 포로들을 풀어주는 대신 코뮌 투사들을 처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도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5월 28일 그날, 체포된 147명의 코뮌 전사들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피의 한 주동안 적어도 2만 명에서 3만 명이 죽었고 4만3천 여명이 투옥되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화정은 투옥된 사람들 중 수백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또 수천 명에게 징역을 살게했으며, 또 다른 4천 여명은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뉴칼레도니아로 추방했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프랑스의 좌파들은 이곳에 모여 추모식을 한다. 추모식이 처음 열린 것은 1905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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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5월 21-28일 코뮌 사망자를 위하여"라고 쓰여있다 (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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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 des Fédérés”(뮈르데페데레스)다.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이라는 뜻이다(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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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외벽에 새겨진 코뮌 전사자 추모 부조. 코뮌 38년 뒤인 190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실제 총살 장소는 아니다. |
페르라세스 묘역에는 파리코뮌의 전사자들의 추모 묘역 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묘비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무정부주의자, 공산당원들의 묘도 함께 있어, 파리 좌파들의 성역 같은 곳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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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나치의 플로젠버그 집단 수용소 포로들의 추모비(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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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45년 자유를 위해 싸운 스페인 사망자를 위한 추모비. 1만명의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2만5천명의 연합군과 함께 싸우다 사망했다고 쓰여있다.(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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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Neuengamme 수용소에서 살해당한 칠천 프랑스인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비(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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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39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국제여단을 위한 추모비(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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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사망자 추모비(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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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샤토브리앙 지역, 나치 치하에서 저항한 영웅들과 순교자들을 위하여(사진 김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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