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세느 강 가운데 있는 시떼 섬의 노트르담. 옛 봉건 프랑스 시대, 이곳은 그냥 교회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사진 김승현 |
1160년부터 건설을 시작했으니 거의 천 년이 다 되는 이 성당은 당시에 새로 부임한 주교 Maurice de Sully의 명에 따라, 있던 교회를 부수고 더 크게 지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주교는 건물의 완성을 다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를 이어 부임한 새 주교도 공사를 계속 시켰다. 이렇게 해서 공사가 계속 이어져 오늘날의 모습을 갖춰 완성된 때는 1345년이다. 그 사이 건물이 더 대지고 장식이 더 붙고 했던 것이다.
건물의 주변에 눈에 띠는 동상이 교회 앞에 하나 서있는데, 샤를마뉴 대왕의 상이다.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정복을 계속 해, 오늘날의 서유럽을 형성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말을 탄 샤를마뉴 옆에는 두 명이 함께 서 있는데 이들도 귀족출신으로 대왕을 모시는 사람들이었다. 이 동상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내가 샹데마르스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파리의 중심이 세느 강에 떠있는 시떼 섬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이 노트르담 때문이다. 성당의 정문 앞, 인도 바닥을 자세히 보면 “포인트 제로-프랑스의 길” 하고 프랑스어로 써있는 작은 원판이 놓여 있다. 여기가 사실 상 파리의 공식적인 한가운데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도 고대 파리 문명의 시작은 이 시테 섬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성당은 프랑스 혁명기에 큰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자.
프랑스 혁명 전 가톨릭 교회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했다. 이 때문에 교회는 십일조 외에도 다른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교회는 또한 출생, 사망, 결혼에 정당한 자격을 주는 유일한 기관이었고, 자신들이 원하는 여론을 형성하는 능력도 있었다. 동시에 초등 교육,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료 서비스 제공 등의 유일한 공공 기관이기도 했다. 사실상 교회가 사회 서비스의 온갖 형태를 제공했다고 보면 되는데, 프랑스의 농촌 지역 대부분은 이 교회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교회의 엄청난 부 때문에 교회 내 부패도 많았다.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는 부패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고, 교회는 사람들이 태어난대로 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했다. 이런 교회에 사람들의 불만은 높아갔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교회는 왕 못지 않은 민중의 적이 되었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의회에서는 타협에 이끌리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의 반동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혁명은 더욱 전진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반동으로 목이 졸려 전보다 더 후퇴할 것이다.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혁명가들과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혁명을 더욱 앞당겼다.
이성을 중요시했던 혁명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러다 1792년에는 이성을 숭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성 숭배는 가톨릭에 맞선 종교적 형태를 띠는 것으로, 실제로 제단까지 쌓았다. 혁명 당시 조셉 후세(Joseph Fouché)는 군 지휘관이었는데 이런 믿음을 다른 지역에까지 확대하여 십자가나 묘지의 성상 등을 강제로 철거시켰다. 교회의 재산은 모두 국유 재산이 되었고 나중엔 민간에 매각되었다. 사제들은 카톨릭에 대한 맹세를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이를 거부한 사제들은 투옥되는 등 심지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혁명이 반혁명에 의해 후퇴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강력히 혁명을 밀어부치려던 결과였다. 성직자에 대한 이런 강요는 로베스피에르 공안 통치가 끝나면서 함께 사라졌다.
종교를 거부하고, 이성에 기초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적 노력들은 매우 사소해보이는 부분에까지 미쳤다. 혁명 정부는 소수 체계에 기초한 새로운 시간 관념을 도입했다. 모든 것을 10을 기준으로 하여, 달력을 한 주 열흘을 기준으로 해 날과 달에 새로운 이름들을 부여했다. 이렇게까지 한 데는 종교적 이미지를 모두 지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1793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포함해 프랑스의 전 교회가 모두 이성의 사원으로 바꼈다. 노트르담 성당의 예수 상과 그림들도 철거되거나 혁명 재원 마련을 위해 매각되었으며, 성모 마리아 상도 철거되어 자유의 여신 상으로 대체되고 대신 이성의 여신으로 불렀다.
또 성당의 정문에는 유대 왕들의 가계가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아마도 프랑스 왕들의 가계도 유대 왕의 가계와 같이 전설같은 가계라는 느낌을 주려고 만들었을테고 실제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혁명 기에는 사람들이 왕들에 대한 분노를 이 석상들에게 돌려 모두 목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1977년에 주변에서 이 잘려나간 목들이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클뤼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이성 숭배를 대신해 최고존재(Supreme Being) 숭배의 원리를 제안했다. 이 최고존재는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에 기초했던 것인데, 이성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이지만, 이 최고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자 덕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매우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혁명의 완수를 위한 로베스피에르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종교로 받아들여졌고 그가 죽은 뒤에는 점차 영향력을 잃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공식 금지되었다.
이런 탈 가톨릭 경향은 혁명 기간 계속되다 1801년, 나폴레옹과 교황 피우스 7세의 조약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 조약은 로마 가톨릭이 프랑스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대신에, 교회와 성직자의 재산은 프랑스가 가지며 성직자의 임면권 역시 국가가 갖고 성직자들의 서약도 국가에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노트르담 성당도 혁명 기간 동안 헛간이나 창고로 쓰이다가 다시 교회로 고쳐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804년, 나폴레옹은 이곳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으며 교황도 여기에 참석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교황이 왕관을 씌어주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관을 썼다.
샤를마뉴 대제와 그 충복 |
성당의 실내 모습. 이곳에서 나폴레옹이 대관식을 했다. |
노트르담 성당 안 기둥 중 하나에 걸린, 1차 세계대전 중 참전한 영국군과 프랑스 군을 추모하는 대리석판(사진: 김승현) |
노트르담 성당 안에 있는 “성 잔다르크” 석상 |
성당의 측면 |
성당의 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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