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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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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 내부 모습 |
프랑스 혁명의 초기,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며 시들해지는 과정이었던 1802년, 빅토르 위고(1802-1885)는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였던 Joshep Hugo였으며, 어머니는 가톨릭 왕당파로 자신의 연인이 나폴레옹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위고 자신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생각한 공화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는 시기는 왕정 복고 기간으로, 그가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프랑스 왕실에게서 받은 것이다. 당시 작품에는 왕당파적, 가톨릭적 색채가 농후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강해지는데, 1830년 7월 혁명 후에 쓴, <노트르담 꼽추>는 가톨릭의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적이었다.
그런데 그의 첫째 아들이 어려서 죽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큰 딸이 결혼 직후에 죽은 1843년 부터는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로 상심에 빠졌다. 이 시기 즈음에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이고 있던 때이기도 했는데, 1841년에 루이 필립에게서 귀족 작위를 받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도 되었다.
작품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치 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1848년에는 보수당원으로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형제 폐지와, 사회정의, 언론 자유 등을 주장했던 그는 1849년에 보수당과 인연을 끊게 되었다. 그의 사형제 폐지론은 국제적인 이목을 받기도 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잡자, 위고는 공개적으로 그를 프랑스의 반역자라고 주장했다. 결국 위고는 1870년까지 Guernesy 섬에 머물게 되고, 이곳에서 <레미제라블>을 완성했다. 물론 그는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정치 팜플렛을 쓰기도 해 프랑스 국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레미제라블>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읽히면서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각광받았다.
1870년 그는 파리로 돌아왔고, 프랑스는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딸이 정신이상으로 입원하고 또 두 아들이 죽는 등, 개인적인 고통을 겪다 끝내 부인도 1868년에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거기에 그가 귀국한 1870년은 프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파리가 포위되었던 상태였다. 흔히 파리포위라고 불렸는데, 프러시아는 파리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파리를 고립시킨 채 계속 공격했고 사람들은 저항했다. 그 사이 파리 시민들은 굶주리며 - 위고의 표현을 빌리면 -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먹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고양이를 잡아 먹었다. 이런 개인적인 고통과 역사적 경험들은 그를 보다 정치적인 활동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1871년 전쟁의 상처와 고통, 지배자들의 배신 등에 대한 분노가 겹쳐진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들은 파리를 버리려는 사람들에 맞서 코뮌을 결성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민중의 지도부를 선출하려는 선거가 시작되었다. 빅토르 위고는 바로 이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선거 패배에도 그는 꾸준히 정치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파리 민중을 옹호하려했던 듯하다.
1885년 5월 22일, 그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국민장이 치러지고, 적어도 2백만 명이 개선문에 모여 판테온까지 가는 길을 따랐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금 파리 판테온에 잠들어 있다.
빅토르 위고를 조촐하게 기념하는 이 조그만 박물관은, 망명 후 그의 파리 생활 상당 기간을 보냈던 곳을 박물관으로 꾸민 곳이다. 빅토르 위고를 기억하게 해줄 수 있는 이만한 곳도 파리에는 없을 듯이다. 어쩌면 위대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박물관으로 치면 이렇게 조촐하고 재미없는 박물관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집에 잡다하게 널려 있는 그 조촐한 것들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불만없이 7유로를 내고 돌아올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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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는 그림에도 소질이 많았다. 그의 작품, "tête de cauchemar" (악몽의 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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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초연하는 극장의 전경. Albert Besnard 1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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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Oliver Merson 1903. Une Larme pour une goutte d'eau. 작가의 소설, <노틀담의 꼽추>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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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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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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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빅토르 위고 청동 흉상(1908년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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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침실. 1878년부터 작가가 사망하는 1885년까지 살았던 d'Eylau 거리에 있던 작가 집의 침실을 실제와 같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가구는 위고의 손자들이 박물관 개장에 맞춰 기증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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