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루아얄, 광장 쪽에서 보이는 정문 (사진은 팔레루아얄 호텔 홈페이지) |
팔레루아얄, Royal Palace, 말 그대로 하면 왕궁이란 뜻이다. 1628년, 추기경, 리슐리외가 지어서 살기 시작했을 때는 '추기경 집'이라고 불렸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던 루이 14세가 이 집에서 살면서부터는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당연히 왕이니까 '왕집 '하고 불렀다.
그 후 루이 14세는 자신의 조카 오를레앙 공작에게 이 건물을 주었다. 이 오를레앙 공작은 필립(Philippe d'Orléans)이라고도 하고 나중에는 평등한 필립(Philippe Egalité)으로 더 잘 알려졌다. 어쨌든 그는 나중에 혁명 기간 동안 왕 루이 16세를 지지하다 루이 16세가 처형 되고 몇 달 뒤 처형 당한 왕족이다.
이 큰 집을 필립에게 준 루이 14세는, 지금은 박물관이 된 루브르를 증축해 살기 시작했고 다시 베르사유 궁전을 새로 지어 살았다. 그 다음 왕들은 이제 베르사유에서 살게 된다. 이쯤되면 프랑스 왕과 왕족들의 궁전은 도대체 몇 개냐 하고 궁금해질 법하다. 프랑스의 왕들이 살던 왕궁은 대략 스물일곱 개나 된다.
그 중 팔레루아얄은 혁명이라는 폭풍 전야의 파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가운데 하나가 된다.
팔레루아얄을 물려 받은 필립은 당시 프랑스가 그랬듯 그 역시 재정 위기에 빠져 있었다. 1780년, 그는 이 팔레루아얄을 크게 고쳐 임대 사업을 하기로 하고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지금의 ‘오페하(Opera)’도 옆에 있고, 루브르와 튈르에 궁도 지척에 있는 알토란 같은 위치니 상업적 성공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엔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팔레루아얄은 팔레메르상트 (Palai Merchants: 상인의 궁) 라고 불릴만큼 크게 성공했다. 파리에서 장사가 되는 곳은 팔레루아얄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급진 좌파 장 폴 마라를 살해한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de Corday)가 칼을 산 곳도 여기였단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속, 욕조 밖으로 팔을 떨어뜨리고 있는 마라의 손 옆에 피 뭍은 칼이 함께 떨어져 있는데 그게 이 칼이다.
팔레루아얄을 가보면 알지만 오늘날에도 쇼핑가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다. 그 때도 이 곳에는 정말 값 비싸고 진귀한 보석과 최신 유행의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수 없이 많은 카페와 클럽 그리고 극장들이 있었으며 도박장도 몇 군데 있었다. 도박장에는 출입금지 원칙이 있었지만, 여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중에는 공주와 귀족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좋은 것은 팔레루아얄에 들어가는 것 자체는 공짜였다는 것이다.
이 곳은 매일 같이 사람으로 붐볐다. "평등한" 필립은 스위스 용병(보통 스위스 근위대라고도 부르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용병이다)들을 시켜 냄새나는 사람들, 군인, 학생, 거지, 개 등등은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니 "평등"이란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지 않나? 그래도 팔레루아얄은 사람들로 북쇄통이었고 덕분에 소매치기들도 먹고 살 만했다.
그 만큼 팔레루아얄은 각종 뉴스와 뜬소문들이 흘러 나오는 본산이 되었고, 수군대는 소리까지 이튿날 파리 유명 신문들에 실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1789년 여름, 팔레루아얄은 정치적 토론과 논쟁, 선동의 장으로 변했다. 그 중 가장 손꼽히는 선동은 당연 1789년 7월 12일, 혁명가 카미유 데몰랭의 격정적인 연설이었다. 그는 “민중들이여, 무장하라!” 하고 외쳤다.
<참조: Paris: Capital of Europe From the revolution to the belle époque by Johannes Williams. Holmes&Meier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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