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드마르스 광장의 초기 모습. 봉기 1주년 기념 행사를 그린 것이다. |
이 군사학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 후인 1750년, 루이 15세가 귀족들을 장교로 키워내기 위한 사관학교로써 건설한 곳이다. 그리고 상데마르스는 이 학교의 연병장이었다. 학교의 공사 시작은 1752년부터 했고, 정작 개교는 1760년이었다. 광장도 60년대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한 명 있다. 아무리 프랑스를 모르는 사람이어도 들어는 본 적 있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이곳 출신이다. 그가 얼마나 영특했는지 모르지만, 보나파르트는 2년 과정을 1년에 끝냈다고 한다. 나폴레옹 이야기도 프랑스 이야기를 하다보면 언젠가 또 하게 될 것이다.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샹데마르스. 광장 끝에 보이는 것이 군사학교다. (출처:www.1iz.net) |
문제는 이를 보고 가만히 있지 않은 프랑스가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살리카 법을 이유로, 프러시아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공격한다. 그러자,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적이었던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가 오스트리아와 한편이 되어 이 전쟁에 뛰어들고, 뒤이어 영국과 식민지, 무역 등의 갈등을 겪던 차였던 스페인이 이 참에 잃어버린 이탈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여러 유럽 나라들도 이 강대국들과의 이해관계에 얽혀 전쟁에 뛰어들었다. 게다가 이들 강대국이 식민 지배하고 있던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까지 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사실상의 세계 전쟁으로 이 전쟁은 커졌다. 왕위 계승 문제 하나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참전하게 되는 게 말이 되나 싶겠지만, 사담 후세인 잡겠다고 이라크 전쟁에 뛰어든 서구 강대국들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라크 전쟁이 사담 후세인만 잡는 전쟁이 아니었듯, 이 전쟁도 왕위 계승 문제로만 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운동이 이때는 없었고, 한 나라의 군주와 지배자들이 맘만 먹으면 어떻게든 전쟁을 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전쟁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이 길어지고 전쟁 수행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그 본질상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면서 파괴한다. 심지어 인간까지.
이 전쟁은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지금의 슐레지엔 지역을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에 주는 대신 각국은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해, 마침내 끝이났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 전쟁으로 지배자들은 더 강해지기 위해서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돈만 대며 잃기만 한 기업가들은 새로운 체제를 꿈꾸게 되었으며, 이 못된 지배자들에게 생명을 뺏긴 평범한 사람들 역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이런 전쟁은 세상이 변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한 오직 최근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른 세상을 열망하게 되는!
적어도 이 시대의 전쟁은 마치 땅따먹기에 눈 먼 군주와 귀족, 성직자들을 위해서 언제든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왕위 계승 전쟁 이전까지는 종교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종교 전쟁들이 일어났다. 이 시대의 전쟁은 남의 땅에 있는 성에 쳐들어가 죽어라 싸운 뒤 깃발을 꽂는 식이었다. (라고 하면 과장일까?) 여하튼 그렇게 해서 뺏은 땅에서 나온 것은 모두 왕과 귀족, 성직자, 기사와 같은 정복자에게 돌아갔고, 정복자는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사실 그것이 목적이었다. 많은 사람과 그들의 삶이 이 과정에서 파괴되었지만, 대부분의 전쟁 중 진영 앞에는 십자가가 서서 이끌었다.(지금 전쟁은 땅을 굳이 따먹을려고 하지 않으며, 전쟁의 승자가 부귀영화를 누리기는 하지만, 부귀영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생명과 삶이 파괴되는 것은 같다)
평범한 사람들, 농민이나 장인, 상인들, 특히 다수 농민들이 전쟁이 일어나면 창을 들고 전쟁에 불려나가야 했고 또 죽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이 왕과 귀족, 기사, 성직자 들의 세상이 지긋지긋할만 하지 않은가? 당신의 가족이, 할아버지나 아버지, 형제들, 또는 용케 당신이 오래 살아남았지만 이제 자식들이, 이 전쟁, 저 전쟁으로 끌려다니면서 죽고, 지옥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는데도, 당신은 왕과 신을 찬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놀랍게 21세기에도 지옥같은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 왕과 신을 찬양하라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되기는 한다) 그렇게 해서 혁명이라는 새로운 씨앗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루 하루 싹 터 간다. 문제는 누군가 그 혁명의 방향을 제시하고 과감하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끌 수 있느냐였지만 그게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어쨌든 1748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또다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한 일중 하나가 바로 이 군사학교를 세우고, 전쟁을 이끌 귀족들을 간부로 키우려고 한 것이다. 아마도 루이 15세와 당시 지배자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전쟁 중에 이전보다 눈에 띠게 강해진 프러시아의 군사 전술 전략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러시아는 아니나 다를까 오늘날 독일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학교를 세우면서, 그 넓은 광장을 군사 훈련을 위해 내줘 만들어진 게 지금의 샹데마르스다. (파리 한가운데 그렇게 넓은 땅을? 하고 놀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중엽에는 그렇게 한가운데는 아니었다. 당시나 지금도 그렇지만 파리의 한가운데는 노트르담 교회가 있는 시떼 섬이다.) 그리고 프랑스 지배자들은 1756년에 다시 ‘7년 전쟁’에 뛰어들었고,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1778년에 영국을 상대로 미국 독립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 사이 왕은 루이 15세에서 16세로 바꼈다.
하지만, 절대군주국가 지배자들의 야심을 위해 만들어진 군사 학교의 연병장이 40여년 뒤에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여지게 되는데 바로 프랑스혁명이다. 1789년 7월 14일 절대군주들에 저항한 정치범들의 형무소였던 바스티유를 공격은 민중의 무장 봉기라고 하는 점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프랑스는 이후 해마다 이 날 혁명을 기념하고 1790년에도 이날 1주년 행사를 열었는데, 그곳이 바로 샹데마르스였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혁명이 특정 날에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혁명에 참가하는 혁명 세력들이 원하는 목적을 집요하게 성취해가는 기나긴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1789년 7월 14일 하루에, 마치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하듯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군주, 귀족과 성직자들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열망이 뒤섞인 혁명은 그 만큼 더 긴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숨겨온 자들의 진정한 의도가 상황의 압력에 의해 폭로되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순교자들의 피를 부르기도 한다. 1791년 7월, 혁명 2주기 상황이 그랬다. 사람들은 이때를 "샹데마르스의 대학살"이라고 기억한다.
이제 샹데마르스에 얽힌 혁명의 기억을 이야기할 순서가 되었다. 1789년 10월 5일, 바스티유 공격과 새로운 의회를 결성했다고 해서 사람들의 가난과 궁핍이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채택되었지만 <선언>만으로 삶이 바뀌지는 않았다. 혁명을 하려면 혁명적 선언도 중요하지만 혁명적 실천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아직도 왕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앙트와네트는 베르사유 궁전에 살며 호위호식하과 이들을 둘러싼 왕당파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무엇보다 앙시앙레짐(구체제라는 뜻)은 생활 속에 있었다.
10월 5일, 그 날 화가 난 파리 시민들, 특히 많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수 천명이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빵을 달라고 외치며 비 속을 걸어 베르사유까지 갔다. 베르사유는 한국의 경복궁 처럼 중심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꽤나 외곽에 있다. 원래 르부르를 궁전으로 쓰다가 루이 14세가 휭황찬란한 베르샤유 궁전을 만들고 그리고 이사간 것이다. 베르샤유 궁전에 사람들이 도착해보니 왕은 사냥가고 없었고 한참이나 왕을 기다려야 했다. 사람들은 왕에게 빵 배급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분노한 사람들은 이튿날 새벽 궁 안으로 쳐들어가 왕 일가를 끌고 파리로 데리고 들어와 버렸다. 이때부터 루이 16세 일가가 파리 시내 튈르리 궁전에 일종의 가택 연금되었다. 민중의 힘으로. 그제서야 혁명이 어느 정도 전진했다.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기로 했고, 십일조도 폐지하고, 고등법원도 폐지하며, 삼색기를 프랑스 국기로 제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길드도 폐지해버렸다.
민중의 압력 아래에 들어간 왕은 다급해졌고, 혁명을 더욱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직 프랑스 국민의회에는 입헌왕정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다수였지만, 기층의 압력을 받은 급진 세력들이 우려스러웠으며 의회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대단한 웅변가로 알려진 입헌왕정 지지세력이었던 미라보마저 국왕에게 파리를 탈출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점차 왕의 처지에서 사태가 악화하자 왕은 반혁명을 시도하기 위해 국외 탈출을 할 필요를 절감했다. 실제로 망명한 귀족들이나 왕가는 지방 반란 봉기를 선동하고, 외국을 설득해 불법적인 혁명을 진압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부인 마리 앙트와네트가 친정인 오스트리아를 설득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왕이 파리를 떠나 외국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한다면, 반혁명 세력을 규합하고 외국 군대까지 끌어들이는, 내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 자코뱅과 같은 혁명 급진 세력들은 왕의 탈출을 계속 경고했었다.
그리고 1971년 6월 20일, 루이 16세 일가는 자정에 맞춰 어둠을 틈타 튈르리 궁전을 빠져 나갔다. 몇 시간 뒤, 파리 전체가 도망간 왕을 찾아 나섰다. 루이 16세와 앙트와네트는 어느 정도 안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도망가는 행색이 하도 휘황찬란해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의 마차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왕 일가의 정체가 탄로나 이들은 바렌느에서 붙잡혔다.
이 일로 혁명의 분위기가 크게 바꼈다. 왕에 어느 정도 동정적이었던 사람들마저도, 급진파의 주장대로 프랑스가 내전에 휩쓸릴 뻔했다는 사실때문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혁명의 전진을 두고 논쟁은 뜨거워졌다. 입헌왕정이냐, 공화국이냐. 왕의 퇴위 문제는 새로운 입헌의회의 결성을 뜻하는 것으로 사실상 공화국 건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지만, 왕의 탈출 사건은 이 논쟁을 현실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자코뱅 내부에서도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다수파와 급진 소수파가 분열했고, 지지 세력은 자코뱅을 탈퇴해버렸다. 이때부터 자코뱅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자코뱅이 되었다. 소수파는 서명 운동을 벌이며 공개적인 회원제를 갖춘 조직으로 변모해갔다.
바스티유 공격 2주년을 기념하는 날이 가까와질 수록 상황은 심각했다. 7월 14일, 샹데마르스에서는 2주년을 기념하는 퍼레이드가 열렸다. 7월 15일, 입헌의회는 왕이 납치된 것이며 왕은 다시 왕위를 이어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입헌의회에는 입헌왕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다수였다. 입헌의회의 이 선언으로, 파리의 거리 곳곳이 분노로 가득찼다. 공화파들은 “헛소리”(Great Lie)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제 자코뱅 클럽으로 몰려갔다. 자코뱅은 청원 운동을 벌였다.
7월 17일, 오전, 샹데마르스에는 수천 명이 모여있었다. 입헌의회의 선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어떤 정치 조직도 허가 없이는 광장에서 만날 수 없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그 너머로 서명을 받는 공화파 세력들이 서명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국민방위대와 입헌 지지 세력간의 가벼운 다툼이 있고 난 뒤 해산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더 많은 파리 시민들이 오전에 있었던 일에 자극받아 더욱 결연하게 광장을 차지하며 서명을 벌였다. 파리 시장 장-뱅 바이유는 시위대가 평화롭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계엄을 선포했다. 라파에트가 군을 이끌고 오후 늦게 도착했다. 작은 마찰이 일어났고, 어디선가 총성이 울려퍼졌다. 사격 명령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사격으로 곧 3-50명이 사망했고 더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 초기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입헌의회는 곧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을 급진세력에게 돌리며, 신문을 폐간하고 정치 클럽들을 폐쇄하며 지도부를 구속했다. 대대적인 탄압이 일었다. 마라, 당통, 데무랭 같은 선동가들이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대신에 혁명은 더욱 급진화해 잠자코 있던 사람들까지 혁명의 어느 한 쪽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입헌의회에 대한 신뢰를 철회했고, 당연히 입헌왕정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파리 시와 국민방위대에 대한 그것들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 혁명은 전진 아니면 후퇴 둘 중에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유혈 사태를 일으킨 프랑스 시장 장뱅바이유는 1793년 11월에 샹데마르스에서 길로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인권기념탑(Le Monument des Droits de l'Homme). 혁명 200주년 기념을 위해 1989년에 세워졌다. |
평화의 벽 (Mur de la Paix) 2000년 3월 30일에 세운, 평화의 벽. 군사학교 앞에 서있는 것으로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영감을 받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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