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5.18민주묘지. 1980년 5월 광주는 전후 한국 역사상 첫 내전(civil war)이었다. |
공동묘지가 민주화 성지로
80년 5월 광주 항쟁의 투사들이 잠들어 있는 이 곳, 국립 5.18민주묘지. 오랜 투쟁과 지금도 멈추지 않는 투쟁의 이야기들이 있는 곳이다. 80년 5월 그날의 투사들이 잠들어 있기도 하지만, 이후 노동운동가, 좌파 활동가와 예술가들이 계속 안장되고 있다. 파리에 페르라세스, 베를린에 프리드리히스펠트가 있다면, 한국에는 망월동이 있다.
망월은 공동묘지가 있는 동네 이름으로, 광주 사람들은 보통 망월동하고 부르면 광주5.18민주묘지를 말하는 것으로 안다. 이곳은 광주의 외곽으로 논밭이 즐비하고 낮은 산과 산이 이어지는 곳이다. 묘지는 이 산들을 깍아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햇볕이 강한 5월에도 그늘이 별로 없다.
이곳이 지금과 같은 민주묘지가 된 것은 1980년 당시 항쟁과 관련한 사망자들이 하나 둘씩 이곳에 묻히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들은 노동자, 학생, 실업자 등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 사망 후 폭발한 "80년 뜨거운 봄"을 진압하고 정부를 장악 한 군부에 맞서 싸우다 군대의 총 칼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병기고를 습격해 구한 총으로 싸우다 숨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맨손으로 싸웠다. 이것은 일종의 내전이었다. 전두환이 이끄는 군부가 도시 전체를 상가집으로 만들면서까지 장악해야 하는 권력을 향한 내전. 공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이다.
80년5월23일 사망한 광주시민들이 관에 안장되어 가족을 기다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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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내전
당시 군부는 대통령 암살 뒤 벌어진 권력의 공백을 서둘러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 쿠데타를 기획했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에 특수부대를 보냈다. 그러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군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계엄, 군대 개입으로 시 정부의 사태 개입력은 전무했고, 행정력도 마비되어 있던 자리를 평범한 광주의 노동자, 민중이 차지했다. 시민수습대책위를 구성한 사람들은 시 운영을 조직해 나가고자 했다. 우선 시를 포위하고 있는 군을 상대로 "첫째,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18 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하고 요구했다. 요컨대 권력 공백기에 선수를 친 군부와, 이에 맞서 저항한 광주는, 5월 18일 첫 희생자를 낸 이후부터 5월 27일 사수대가 전남도청에서 진압되는 열흘 동안, 지역 내에서는 이중 권력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왜 광주였을까? 광주가 표적이 된 것은 서울에서 멀다는 점, 작은 도시로 주요 산업 시설이 많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주변에 군부대가 있어 군을 쉽게 동원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시위가 멈추지 않고 반(反)군부 정서를 강화하며, 김대중과 같은 야당 정치 세력들에 대한 지지가 확대되어 초래될 위험 부담을 더 우려했을 게 분명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김대중 정치 세력은 이곳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지역 일대에 강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독재 타도",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왜 광주였을까? 광주가 표적이 된 것은 서울에서 멀다는 점, 작은 도시로 주요 산업 시설이 많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주변에 군부대가 있어 군을 쉽게 동원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시위가 멈추지 않고 반(反)군부 정서를 강화하며, 김대중과 같은 야당 정치 세력들에 대한 지지가 확대되어 초래될 위험 부담을 더 우려했을 게 분명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김대중 정치 세력은 이곳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지역 일대에 강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독재 타도",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다.
국제적 맥락: 블록 경제와 독재
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국제적 관점이 필요하다. 1980년대는 여전히 미소 양국 간 블록 경쟁 체제가 유지되던 때다. 특히 70년대 위기 이후 두 나라는 주변 위성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 위성국들은 대부분 독재 국가였다. 이들은 각종 협잡, 음모, 폭력, 살인 같은 방법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억눌렀다. 동유럽, 남미 지역이 그럴 가능성이 컸다. 미국의 지역 전략적 안보 우선 순위에 비한다면 한국은 일본, 남미, 중동에 훨씬 후순위였다. 게다가 중국이 소련 보다 덜 위협적이어서 남북 이슈는 세계적 수준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다. 물론 미국이 우려 수준이기는 했다.
한편 이승만, 박정희 독재 하의 한국은, 다른 전후 독립 국가나 민족 해방 투쟁 등 내전을 경험했던 나라와 마찬가지로, 산업적 인프라가 충분치 않고 1 차 산업에 의존적이었으며 그밖의 산업은 저발전 상태에 있었다. 국가가 산업 발전을 주도해야 했다.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방법은 중점 육성 기업에 대한 엄청난 지원과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낮은 임금과 대량의 노동시장(산업화와 그에 따른 이농현상, 즉 농촌공동화의 결과)은 자본주의 축적의 고속도로였다. 경부고속도로가 아니라 말이다! 70년대 섬유 산업의 발전은 이 같은 전형적인 사례였다. 전태일을 중심으로 한 섬유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결과였다. 물론 이런 산업 발전 조차도 어디까지나 선발 외국 자본주의 국가들을 모방하거나 그 길을 따르는 것이었지 거기에 창의력이나 혁신 따위는 없었다. (한국식 자본주의 따위는 없었다!)
계속된 저항과 경제 위기
정치적 민주주의의 결여와 경제적 초착취 하의 억압 상태는 저항을 낳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소 체제 하의 독재적인 위성 국가들은 대부분 반(反)독재 투쟁이나 민주화 운동 같은 대중 운동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모두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또 다른 쿠데타로 운동이 "납치"되기도 했다. 한국은 그 최악의 경우에 해당한다.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한국에서는 지속적인 지하 운동이나 산발적인 운동이 이어졌다. 특히 노동자들의 투쟁이 번번히 일어났는데 60년대 초반은 교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단연 눈에 띠었다. 군사 독재 하 정부 통제를 받는 노동조합들이 파업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일어났으며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운동은 조직적 노동운동으로 더욱 발전하지 못하고 정부와 노조 관료, 사측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학생이나 종교, 시민 단체, 용감한 개인들 정도가 느슨한 형태나마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70년대 후반은 세계 경제 위기에 연동된 대외 의존적인 한국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던 때였다. 원자재가 인상, 환율 인상, 외채상환으로 인한 대외 손실 등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증세, 물가 상승, 실업률 증가 등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은 수출에 거꾸로 영향을 미쳐 수출 중심 산업을 흔들었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 위기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경제 위기가 오랜 독재로 빚어진 정치 위기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폭발하게 되었다. 그것이 마산, 부산 지역에서 일어난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하는 부마항쟁이었고, 이보다 조금 전에 일어난 YH사 농성, 그리고 80년 초 사북항쟁 등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는 지배자들을 분열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1979년 10월 26일 현직 대통령의 오른팔 김재규가 자신의 주군을 암살했다. 그의 개인적인 원한과는 상관 없었다. 김재규는 자신의 조국이 이 한 사람 때문에 위기에 내몰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 사람 죽이는 일을 했다. 이 자들은 지금껏 문제가 되는 사람이 이으면 그를 없애면 된다고 믿고, 그렇게 해오면 살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암살은 또 다른 박정희를 불러왔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며 엄청난 탄압과 살상을 벌였다. 광주는 그 과정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 과정은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락되고 눈감아졌다. 물론 미국은 전두환 세력을 용인하므로서 그들의 충성을 계속 받을 수 있는 것이 분명했고, 또 이 자들이 벌이는 학살에 굳이 개입할 미국의 이익이란 것도 없었다.
운동의 약점
광주 지역이 고립되어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 단지 전두환 중심의 군부와 그 세력의 결정 그리고 미국이 눈감아 준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운동 내의 사정이 존재한다. 독재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하는가는 모두에게 중요한 물음이었다. 당시까지 운동을 조직해온 사람들의 대다수는 대학생,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한 단체나 아니면, 종교, 시민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적 수준에서 이들은 분명 상대적으로 좌파였지만, 국제적 수준에서 보면, 범 민주주의자 또는 범 민중주의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민주 vs 독재 구도로 이해했다.
이런 태도는 지난 3-4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급속하게 성장한 노동 계급의 문제를 희석하거나 부차화하는 효과를 냈다. 반독재 운동은 분명히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었고, 민주주의 그 자체는 노동자들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재가 사라진다고 해서 작업장에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문제가 민주주의로 치환되었다. 사회 절대 다수가 노동자인 사회가 되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낮은 조직률과 국가 통제를 받는 노조 관료들의 억압을 받으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착취당하고 극도의 소외를 경험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악기 회사에 다니는 한 노동자는 칼을 준비해 사장을 협박하며, 작업 반장 교체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다가 인질범으로 잡혀 구속되기도 했다. 이 노동자에게 세계를 민주 대 독재의 구도로 설명하고 함께 싸우자고 하는 것은 너무 조야하다.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 힘을 최대한 끌어 올릴 수 있는 전략적 관점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자에게는 조직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했다.
이런 약점 때문에, 정작 군부가 흔들리고 곧장 대중 운동이 표출하며 사태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정도로 확대하자 곧 지식인과 재야 정치인, 학생 중심의 운동 지도부는 신군부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갖고 신중론과 자제론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곧 신군부가 더욱 밀어부쳐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는 고립된 채 신군부에게 학살되었다.
이런 약점 때문에, 정작 군부가 흔들리고 곧장 대중 운동이 표출하며 사태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정도로 확대하자 곧 지식인과 재야 정치인, 학생 중심의 운동 지도부는 신군부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갖고 신중론과 자제론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곧 신군부가 더욱 밀어부쳐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는 고립된 채 신군부에게 학살되었다.
이런 한계와 약점들은 어쩌면 당시의 상황에서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냉전의 상황과 가혹한 억압 하에서 패배를 거듭하거나 대중 사이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했던 운동가들에게는 70년대 말과 80년대 상황은 지나치게 버거운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태국의 71년 쿠데타를 저지했던 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의 경험을 보면 과연 불가피한 패배였나 돌이켜보지 않을 수없다.
망월동의 현재
역사는 돌이킬 수 없고, 그 날에 죽은 사람들은 망월동에 묻혔다. 그들뿐만 아니라, 항쟁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망월동을 찾아 왔다. 아무리 좋게 이야기하려고 해도, 이들의 무장 투쟁은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특수 정예 병력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 무기에 의해 결정되기 보다, 그보다 대의 명분과 정치적 사기에 의해 결정된다. 광주는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을 지라도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80년 광주는 여전히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역사를 뜻했다. 사실, 더 큰 투쟁의 과정의 일부였던 80년 광주가 일 회 패배했더라도 그것은 전투의 패배지 전쟁의 패배는 아니었다. 지금도 "더 큰 투쟁"의 의미는 계속 재해석되고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80년 5월 항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노동운동, 정치운동의 희생자들이 여전히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지금도 망월동은 - 조금은 어처구니 없어 보이기도 하는 - 특별한 이유로 이 같은 반정부, 민중 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한 곡의 노래가 발단이 되었다. 이 노래는 내전 당시 사망한 시민군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윤상원과 광주지역에서 야학과 노동운동을 하다 죽은 박기순, 두 사람의 1982년 영혼 결혼식에 처음으로 공개된 서정적이면서도 결의찬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한다. 가사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1789년 혁명기에 불려지고 지금은 애국가가 된 프랑스의 그것에 견준다면 '행진곡'은 차라리 연애시 수준이라고 해야할 정도다.
프랑스 애국가는 "가자, 조국의 아들들아! 영광의 날이 왔다.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을 높이 들어라" 하고 시작하지만, '행진곡'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하고 시작한다.
그런데 우파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들은(지난 10년 사이 두 명) 줄곧 이 노래가 추모 행사 곡으로 적절치 않다는 둥의 이유를 대며 정부 공식 추모 행사인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우파가 80년 이후 광주를 "빨갱이 도시"라고 비난해 왔던 까닭 때문인 듯하다. 그 동안 우파들은 당시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이 북한의 스파이가 암암리에 개입한 결과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우파들 사이에 계속 재생산, 확대시키고 있다. 짐작컨대 대통령의 불참에 노래는 핑계일 뿐이고, 참배가 갖는 정치적 의미가 더 중요한 듯하다. '광주는 우파들이 지배해야 하는 곳이지, 참배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망월동을 만들어 냈던 그 투쟁이 아직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 김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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