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4.19 묘지

국립4.19민주묘지 안의 기념탑. 사진 김승현

한국전쟁은 세계 주요 열강이 대거 참가해 한 나라를 두 개로 쪼개어 통치하다가 결국 전쟁까지 몰아가며 마침내 두 나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에서 세계사와 분리되어 생각되어질 수 없다. 이것은 한국전쟁이 냉전체제라고 불리던 당시 열강들의 대리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냉전은 전혀 차갑지 않았으며 당시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국가 중심으로 블록화한 국가들 사이의 열띤 자본주의적 경쟁이 가능했었으며, 각각의 체제에서 살던 평범한 사람들은 그 나름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동서로 분단되었다던 두 진영의 직간접적 간섭을 받으며 살았던 수많은 나라들에서 크고 작은 봉기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1960년, 오늘날 419 혁명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 역시 그 배경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일제 하에서 성장하고 그나마 전쟁으로 무너진 한국 자본주의 성장을 위한 모든 노력들은 하나같이 과거 친일, 이후 친미 세력의 권력 장악과 이를 통한 부패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1945년과 1950년 전쟁이라는 두 계기를 거치는 동안 소위 "자유 세계"를 엄호한다는 미국의 지원 아래서 "반공"의 이름으로 유지 공고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으니 그 첫 대중적 분출이 바로 이 4.19 운동이다. 부르는 데 있어 혁명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도 있는데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비록 체제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정치체제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이 승리가 노동자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 경제 투쟁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변화의 가능성도 힐끔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운동은 전후 이승만과 친일, 친미 세력들이 장악한 한국 지배 구도에 맞선 전면적인 도전이었고 동시에 당시 세계를 둘로 나눠 공고히 되어 가고 있던 냉전 체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전 사회적인 지지를 받으며 동참했다는 점은 전쟁이 끝난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더욱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는 냉전체제 5, 60년대 동서에서 벌어진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운동은 무능력한 민주당 정권을 끌어내리는 아래로부터 더 강력한 투쟁으로 나아가기 전에 한줌도 안 되는 군인들의 반동에 의해 갈 길을 잃어버렸다. 아래로부터 투쟁의 역사가 전진하는 과정에서 수 없이 많은 도전에 부딪히게 되는데,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우익 반동의 시도들은 언제나 결정적인 도전 가운데 하나였다. 4.19 혁명 역시 그런 사례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1960년 4.19 운동에 참가해 생명을 잃은 숭고한 그들의 주검이 안장된 곳이 서울 강북에 있는 국립4.19민주묘지다. 수유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이 곳은 보기 드물게 묘지치고는 공원처럼 아늑한 분위기다. 북한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과 공기가 돌아가신 이들을 편안히 안아주고 있는 듯하다. 민주주의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평범한 사람들의 도전을 잊지 말자. 


4.19민주묘지 안 연못과 분수대. 사진 김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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