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루냐 인들의 헌사, 조지 오웰 광장

조지 오웰의 작품 <<1984>>를 기리는 그라피티. 여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사진 김승현.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 공화국의 편에서 파시스트에 맞서 싸운 것은 매우 역사적인 사건의 일부였다. 사건 자체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피에르 브뤼에가 말했듯이, 러시아 혁명이 제1차 세계대전을 끝냈다면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유주의 역사가들이 이야기하듯이 이 전쟁이 '파시스트 vs 민주주의'의 전쟁인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또는 패전 후 사형 당하거나 추방 당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바랐던 것은 계급 전쟁에서 '혁명'의 방어였다.
오웰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트로츠키는 1910년대 러시아와 같이, 1930년대 스페인이 유럽의 약한 고리라고 했는데, 이곳에서의 혁명의 승패가 나머지 유럽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파시스트 반동에서 혁명을 방어하는 것은 노동자, 농민들이 사회를 집산화하고 착취 관계를 없애며 혁명적으로 개조하며 일궈낸 성과들을 지켜야 하는 일이었고, 만약 패한다면 엄청난 반동, 스페인-독일-이탈리아-일본 파시스트 들이 일으킬 세계 전쟁이 불 보듯 뻔했던 것이다. 결국 내전의 패배로 당시 유럽 혁명가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내전의 패배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스탈린주의의 위험을 바로 보고, 혁명을 더 전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다)

프랑코, 파시스트를 상대로 한 스탈린주의 위험한 도박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더 큰 그림의 일부였지만, 그것이 스페인에서 현실화했을 때는 혁명의 열정을 꺽는 반동이었다. 노동자들의 전진을 가로막고, 선동을 파시스트의 간첩 행위로 몰아가며 그런 사람을 잡아들이거나 죽였다. 조지 오웰은 여기서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이었고 이후 스탈린주의의 위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에 경고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작품이, ≪동물농장≫, ≪1984≫였다. ≪동물농장≫은 스탈린이 권력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1984≫는 스탈린주의가 안착한 사회가 어떻게 전 사회를 억압하는 지를 그렸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은 그에게 특별했던 것이다. 그가 쓴 ≪카탈루냐 찬가 Homage to Catalonia≫는 내전 중 가장 치열했던 카탈루냐의 노동자와 병사들, 그들이 지키려했던 혁명에 대한 헌사(homage)였다. 물론 문학은 그 자체로 역사적 맥락을 떠나, 독자들에 의해 훨씬 더 자유로이 해석될 수 있지만 말이다.  
조지 오웰 광장이라고 써진 주소 표지판이 보인다. 광장은 미로 같은 구시가지의 고딕 지구와 지중해 해변을 잇는 골목길에 만들어졌는데, 광장이 만들어지고 난 후 사람들로 늘 붐빈다. 조지 오웰을 아는 사람은 이 곳을 꼭 들러보지만, 광장 자체가 오웰 자신과 직접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1996년 바르셀로나 시가 그때까지 이름이 없던 이 광장을 조지 오웰의 이름으로 기념하기로 했던 것이다. 사진 김승현.
그런 그에게 카탈루냐의 주도, 바르셀로나가 광장을 헌사했다. 1996년 3월 5일의 일이다. 바르셀로나 시는 그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파시스트에 맞서 함께 싸운 것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조지 오웰 광장. 광장 주변의 카페에 앉아 그의 책을 읽는 것도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딱 첫 장만이라도 말이다. 

"나로서는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은 도시에 들어가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좀 크다 싶은 건물은 거의 예외 없이 노동자들이 장악했다. 건물마다 빨간색 깃발이나,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담벼락마다 소련 국기나 혁명 정당들의 머리글자를 휘갈겨 놓았다. 교회는 내부가 거의 다 박살났고, 성상들은 불에 탔다. 노동자 무리들은 여기저기서 조직적으로 교회를 철거했다. 상점과 카페마다 집산화되었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상자 같은 구두닦이들의 점포조차 집산화되어,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웨이터와 지배인들은 손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동등한 입장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굴종적인 말투나 격식을 차린 말투까지도 일시에 사라졌다. 아무도 <세뇨르>나 <돈>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스테드>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모두 상대를 <동지>나 <당신>이라고 불렀다."(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한편, 이 광장에는 재밌는 역사가 있다. 이 광장은 원래 1990년에 도심 밀집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광장 가운데 있는 조형물도 레안드레 크르소트폴이라는 한 초현실 미술가가 1991년에 만들어 설치한 것이지, 조지 오웰과는 상관 없다. 게다가 광장에는 이름도 없었다고 한다.  조지 오웰 광장이 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그런데 고딕 지구와 해변으로 이어지는 뒷 골목이었던 이 곳에 광장이 만들어지자, 바르셀로나의 미로 같은 구 시가지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경로가 되었고, 이윽고 술집, 카페 등으로 시끄럽기 이를 데 없어졌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매치기 피해도 늘어났다. 게다가 밤이 되면 우범지대로 변해 각종 불법 약물 거래와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웃 사람들의 불편이 늘어났고 시에 대한 민원도 끊이질 않았다. 2001년, 바르셀로나 시는 이에 대한 조치로 보안카메라를 설치하기로 했는데, 조지 오웰 광장에 가장 먼저 설치하고 다른 지역까지 확대해 갔다. 오웰이 쓴 ≪1984≫의 "빅브라더"를 떠올리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그의 이름을 딴 광장에서 벌어졌다. 
조지 오웰 광장. 오른쪽에 보이는 조형물은 오웰의 이름을 따기 전인 199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오웰과는 상관이 없다. 가로등과 공원은 이곳의 보안카메라를 폐쇄하면서 2011년에 설치되었다. 광장은 조지 오웰을 찾는 사람들이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사진 김승현. 


물론, 보안카메라 설치로 광장의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시끄럽고 민원도 많았다. 여기에 보안카메라가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시민단체의 항의도 늘어났다. 시는 보안카메라가 공공 장소기 때문에 시민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것일뿐 시민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조지 오웰 광장이라는 이름과는 상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시는 방침을 바꿔 10년만인 2011년, 보안카메라를 폐쇄하기로 했고 대신 어린이 놀이터, 가로등, 화단 등을 더 설치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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